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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개학하니까 살 것 같다."

믿기 힘들게도 아이들은 이번 겨울 방학에 짠 점수를 주었다. 오전 8시 30분까지 등교하지 않아도 되고,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되는데 왜 방학이 힘들었을까?

학기 중에는 휴일과 방학을 애타게 기다리며 남은 날짜를 세기까지 한 녀석들이었다. 지난 12월 29일 방학식 날 우리가 헤어질 때 외쳤던 구호는 "여행은 겨울이 별미다"였지만 설 연휴를 제외하고 삼척 땅을 벗어난 아이들은 손에 꼽았다.

"도대체 40일 동안 뭐하고 살았니?"
"학원 가고, TV 보고, 밥 먹고 지냈어요."

학원 문제집을 보자고 했다. 교과서를 제작하는 출판사에서 만든 '초등 단원평가 모음집'이었다. 일제고사가 사라진 2017년에도, 20년 전 내가 푼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문제집에 빨간 색연필로 채점되어 있었다. 별표를 쳐놓은 어려운 문제에는 학원교사나 엄마의 필적이 남아있었다. 이것 말고도 다른 책이 한 권 더 있다고 했다.

그 옆에 앉은 J는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겨울 방학 숙제를 공책 두 장으로 끝낸 그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컴퓨터 게임을 했다고 했다. 현실세계로 아직 로그인하지 못한 J는 행동이 굼뜨고 의욕이 없었다. 아이들의 회색빛 방학 생활을 들으며 다소 침울해졌다.

축 처진 우리들의 감각을 파릇파릇하게 일깨워줄 책이 필요했다. 도서관에서 찌뿌둥한 기분을 확 바꿔줄 책을 집어왔다.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이 난다는데, 딱 그런 상태를 그린 서현 작가의 '눈물바다'였다.

 시험이 뭐길래 아이들을 한숨쉬게 하는 걸까?
시험이 뭐길래 아이들을 한숨쉬게 하는 걸까? ⓒ 사계절

'시험을 봤다.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첫 문장부터 아이들은 탄식을 했다. 학교란 곳은 평가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표정이었다. 주인공의 시험지는 새하얗고 무지 길다.

'점심밥은 왜 이렇게 맛이 없는 걸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험을 마친 밤톨이는 야채 반찬만 잔뜩 나오는 끔찍한 점심식사를 한다. 심지어 밥에는 커다란 검은 콩이 군데군데 박혀있다.

"불쌍하다. 내일 점심에 또띠아 피자 나오는데."

개학하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영우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마찬가지로 오랜 침묵을 지키던 난희가 귤 푸딩이 디저트로 나온다고 거들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 하였던가? 영양사 선생님이 초등학생 입맛에 꼭 맞게 짜준 식단은 주인공의 절망적인 채식 식판과 대조되며 천사가 해준 음식이 되었다.

"너무 가까이 오면 뒤에 아이들이 안 보이니까 조금만 물러서자."

밤톨이가 먹는 풀잎 반찬을 자세히 보겠다며 앞으로 다가오는 몇몇을 말렸다. 타인의 불운은 큰 흥밋거리였다. 삶에서 행복과 기쁨을 스스로 건져 올리면 가장 좋겠지만 인간은 타인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면서 안심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콩밥에 나뭇잎을 억지로 올려먹는 밤톨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면서도 즐거워했다.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평안을 확인하는 행동은 사람의 보편적 습성 같았다.

주인공의 시련은 계속된다. 악마 뿔을 한 짝꿍 호박이가 먼저 약을 올려도 선생님의 손은 밤톨이의 왼쪽 귀를 찢어져라 잡아당긴다. 사실 밤톨이를 좋아하는 호박이는 그런 장면을 즐긴다. 주인공은 상자를 뒤집어쓰고 혼자 집으로 간다. 먹구름 아래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집에 오니 암컷 공룡과 수컷 공룡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우고 있다. 암컷 공룡은 뒤집개를 흔들고, 수컷 공룡은 넥타이를 펄럭인다.

"설날 끝나고 우리 집 풍경이네."

조숙한 M이 무심하게 툭 던졌다. M은 명절마다 엄마 아빠가 싸운다는 공식이 있다고 했다. 눈치 없는 남자애들이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는 사이, 여자애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생활 만 3년을 채워가는 나도 공감했다. 어떤 우울함과 슬픔은 머리로 이해될 때 찾아오는 법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살벌한 집안 분위기에 주인공은 밥 먹을 기운이 나지 않는다. 저녁밥을 남긴 밤톨이에게 엄마는 폭풍 잔소리와 짜증을 퍼붓는다. 아빠를 쏙 빼닮은 아들 생김새가 분노에 한몫을 했다. 하나도 되는 일 없이 우울한 하루를 보낸 밤톨이는 눈물이 난다. 자꾸만... 자꾸만...

 하나도 되는 일이 없는 슬픈 저녁
하나도 되는 일이 없는 슬픈 저녁 ⓒ 사계절

"훌쩍, 훌쩍, 훌쩍"

서러워서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흐른다. 우는 게 서러워 더 눈물이 난다.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되듯, 눈물 방울이 모이고 모여 방을 채운다. 꿀렁꿀렁 침대가 물 위에 뜨고 마침내 눈물은 바다를 이룬다. 철썩철썩 온 집안에 파도가 친다. 눈물바다에는 수화기 들고 친구한테 하소연하던 엄마와 씩씩 거리며 신문 읽던 아빠가 둥둥 떠다닌다.

"헐. 얼마나 울었으면 바다가 되냐?"
"쟤 침대에서 웃고 있어!"

책장을 뚫어져라 보던 아이들이 올라간 밤톨이 입꼬리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침대 뗏목을 탄 주인공은 미소 짓는 얼굴로 노를 젓는다. 웃음은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이 있는 것일까?

책 읽는 우리 반 친구들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이제야 내가 알던 녀석들 같았다. 함께 책 읽고 장난치고 떠드는 게 아이들인데 방학에 이걸 못하고 있었으니 기운이 빠질 만도 했다. 홍수처럼 넘실거리는 눈물바다의 기세를 타고 다음장으로 넘어갔다.

집 밖 사정은 더했다. 눈물 쓰나미가 도시를 덮쳤다. 담임 선생님은 물고기 떼의 습격을 받아 우왕좌왕하고, 사악한 호박이는 의식을 잃고 물살에 이리저리 떠밀려 난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자동차와 집이 잠기고 거대한 바다 괴물이 사람을 삼키려 든다. 우리의 밤톨이는 이런 풍경에 아랑곳 않고 빌딩만 한 대형 파도를 미끄러지듯 타고 있다.

"야-호!"

 주인공을 울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허우적거린다.
주인공을 울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허우적거린다. ⓒ 사계절


"저러다 다 죽겠네."

누가 오십천 끼고 사는 강원도 주민 아니랄까 봐 종렬이가 큰물 난리를 걱정했다. 그 말을 듣고 나연이가 종렬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지금 홍수가 문제냐?"

나연이는 이미 밤톨이와 함께 파도를 타고 있는 서퍼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기쁨과 설렘이 담긴 눈빛이었다. 어느 누군들 서럽지 않은 날들이 있겠는가? 밤톨이가 펑 터뜨려 버린 눈물이 바다가 되었다. 그 안에서 놀겠다는 아이를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속에서 썩어버리는 눈물보다 넘쳐흐르는 바다가 더 투명하고 깨끗했다.

실컷 즐긴 밤톨이는 "으잇차!" 소리 지르며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준다. 축축하게 바닷물에 젖은 이들을 탁탁 털고, 야무지게 줄에 걸어준다. 그걸로 모자랐는지 쪼그려 앉아 헤어드라이어로 하나하나 말려준다. 뜨뜻한 기계 바람에 짜가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저 사람들이 깨어나서 밤톨이한테 항의하면 어떡하지?"

마음 여린 하영이가 벌써부터 사람들 깰 고민을 했다. 하영이 말고도 여럿이 움찔거렸다. 파티는 짧고, 뒷정리는 긴 것일까? 약자들은 언제나 강자의 재림을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어린이들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존재들을 온몸으로 버티며 살아왔을 것이다.

눈물바다에서 마음껏 환호성 지르지 못하고, 물에 빠진 이들의 보복을 두려워해야 하는 연약한 삶. 하영이의 걱정에 나는 말없이 책장을 넘겨 밤톨이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모두들 미안해요. 하지만......"
"시원하다, 후아!"

아이들은 모두 활짝 웃었다. 우중충했던 개학날이 맑게 갰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 사계절



눈물바다

서현 지음, 사계절(2009)


#서현#눈물바다#그림책#개학#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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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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