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후,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까요? 광화문 광장의 '퇴진 캠핑촌'은 촛불 시민과 시민단체들의 대안 토론 광장을 엽니다. 이 기획은 <오마이뉴스>와 <광화문 퇴진 캠핑촌 광장토론위원회>가 공동기획했습니다. [편집자말] |
촛불항쟁은 말 안 듣는 국회를 끌고 가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80%의 탄핵 찬성 여론에 맞춰 국회의원 80%가량이 탄핵에 찬성하면서 국회는 한국 현대사상 가장 높은 신뢰를 획득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여소야대 상태임에도 국회의 박근혜 정책 뒤집기는 신통치 않다.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가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모았고, 몇 몇 의원들은 눈부신 활약을 했으며, 또 다른 몇 몇은 한국 기득권집단의 추레한 몰골을 드러내 국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하지만 특정위원회, 특정 의원의 성과를 두고 국회 차원의진전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사실상 국가 간 조약이며 재정에 부담을 주는 사드 배치. 국회 비준을 받는 것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채, 되레 몇몇 야권 대선 주자들의 모호하고 투항적인 태도로 반대운동을 고립시키고 있다.
영화 <판도라>로 핵발전소 사고 위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지진대 경주에 자리한 월성1~4호기의 재가동 결정을 내렸다. 원안위 결정은국회 의결을 이길 수 없다. 그나마 국정교과서 금지 법안이 추진되고 있는 정도다.
국회 300석 중 야3당 의석이 170석을 돌파한 상황에서도 여전한 지지부진. 이게 다 합의 없이는 안건 처리를 대단히 어렵게 만든 국회선진화법 때문인가?
국회선진화법상 120석이상인 정당은 안건 통과를 막거나 지연시킬수 있지만, 박근혜가 속한 새누리당의 의석은120석은커녕 개헌 저지선인 100석에도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야3당에 바른정당까지 합의를 이뤄내는 것이 그리 순탄한 일은 아니며, 자유한국당(옛 새누리당)을 무작정 협상에서 배제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현 상황을 뒤집어 가정해보자. 자유한국당 의석이 170석을 넘고, 제1야당의 의석이 100석 미만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를. 지난해 3월 통과된 테러법외에도 숱한 악법이 통과되었을 것이다. 현 국회의 지리멸렬에는 대선을 앞둔 제1야당의'부자 몸조심', 보수와 개혁 사이에 낀 제2야당의 '간보기'가 한몫 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권이 교체되면 새 정부는 6개월간 개혁드라이브를 몰아쳐야 한다. 여기서 승부가 난다." 요즘 정계에서 도는 말이라고 한다. 한 야당 소속 전직 국회의원도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런 취지의 의견을 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지가 실천적으로 입증이 안 되고 있다. 마땅히 국회가 증명해야 할 일이다. 이번 탄핵 정국에서 일부 정치인들은 '개헌'을 끼워 팔기하려고 했다. 그들의 개헌론은 주로 권력구조 개편을, 특히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가리켰다. '4년 중임 대통령제'를 말하는 이들도 '분권형 대통령제'를 전제하고 있다.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든 분권형 대통령제든 이 개헌론들은 의회가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는 권력구조를 가리키고 있다. 간략히 말해 이런 개헌론은 국회의 권한을 강화시키자는 뜻이다. 그런데 현행 '대통령중심제'에서 의회는 대통령 및 행정부의 열위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지난해 12월9일 대통령 탄핵이 보여주었다. 국회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대통령의 권한은 정지된다. 2004년 3월에 이미 실행이 가능함을 한 번 확인한 바 있는, 1987년 개헌 이래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제도다. 국회는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다.
가령 국회는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동해도 과반 의석의 결의로 이를 해제할 수 있다. 국무총리 후보자는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총리나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는 물론이고 탄핵도 가능하다. 미국식 대통령제와 달리 국회의원이 총리나 장관을 겸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교과서적으로는, 한국의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제라고 정리하고 있다.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말하는 이들이 자신의 대안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 이미 현행 헌법하에 조성되어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악행으로 얼룩진 대통령이 탄핵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상태라면, 국회는 즉각 정국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특히 일부 개헌론자들은, 이원정부제나 내각제를 운위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 국회의 정국 운영 능력을 증명해보여야 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부역자 황교안 국무총리가 아니라, 국회가 진정한 '책임총리'가 되고 '대통령 권한대행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권은 총리 교체도, 내각 총사퇴 및 거국내각 구성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국회의 결정을 꺾을 수 있는 행정부의 조처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정도다. 다시 말하지만 국회는 행정부(대통령)의 우위에 있다. 일종의 비상내각을 국회가 짜면 된다. 적임자를 물색하고 협상을 모색하느라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다. 이미 선출돼 있는 국회의장과 부의장, 국회 상임위원장들 그리고 각 정당 원내대표들을 주축으로 놓으면 그만이다.
여당으로서도 배제되는 것은 아니니 반대할 명분은 없다. 특히 이번 탄핵정국에서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를 주장했던 의원들은 소속 정당을 막론하고 이를 반대하면 안 된다. 국회판 비상내각이야말로 한국 권력구조에 녹아든 '의원내각제적 요소'의 발현이다. 이걸 못할 것 같으면 권력구조 개편도 집어치우는 게 맞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상 상시회기로 국회를 운영해야 한다. 적어도 박근혜 축출까지는 그렇다. 문 닫을 틈이 없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표결 없는 안건 표류가 합의제 민주주의의 특성은 아니다. 표결 또한 합의의 결과며, 급박한 사안이라면 표결을 실시해야 한다. 2016년 2월 당시 국회의장 정의화는 '국가비상사태'라는 이유로 테러법을 본회의에 직권상정 했다. 정의화는 법률 자문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국가비상사태'라는 근거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에 비하면, 예컨대 월성 핵발전소 재가동 같은 사안은 훨씬 중대한 비상사태다. 지난해 추석을 즈음한 지진은 영남권을 흔들어놨고 최근까지도 경주에선 지진이 잇따랐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비상사태인데 직권상정을 추진 또는 압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과정에서 중간중간 걸림돌이나 덫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 국회와 야당은 변변한 시도조차 하고 있지 않다.
개헌 문제도 그렇다. 국민적 합의는커녕 토론조차 제대로 해보지 않고 다분히 정치공학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권력구조 개편이야 뒷날로 미루더라도, 공감대가 있는 사안을 따로 추려내 국회가 개헌안을 통과시킨 뒤 대선과 같은 날 국민투표에 부칠 수도 있다. 국회의원을 소환하는 제도에 반대하는 국민이 얼마나 있겠나. 이를 막아서는 정치인은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같은 국민소환제 도입이나, 대통령이 독점하고 있는 국민투표 부의권을 국민과 국회에도 열어준다거나, 국민이 법안을 발의할 수 있게 한다든가 하는 '민주주의 심화' 관련 개헌안은 지금 당장 추진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해야 국회도 신임을 얻고 분권형 권력구조 개편에도 호소력이 실린다. 당장에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정권교체는 선거가 아닌 국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국회가 로두스다. 거기서 뛰어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장신문> 4에도 게재됐습니다.
글쓴이는 김수민 전 녹색당 구미시의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