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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다리를 달달 떨면서 삼십 분째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고민의 주제는, 이번 글은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였고요.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슴에 깊이 남아 있는 소설 <스토너>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 짠하면서도 어느 면에서 보면 모질기도 한 이 남자. 이 남자의 인생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요.

 책표지
책표지 ⓒ RHK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면 역시 시작이 좋아야 하는 법. 탁월한 시작을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봅니다. 얼마 전에 했던 수술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 볼까, 아니면 이 소설을 읽고 너무 벅찬 나머지 가족에게 줄거리를 들려줬다가 호응을 얻지 못해 실망했던 에피소드로 시작해 볼까, 아니면 작년부터 왠지 삶을 달리 보기 시작한 내 사정에 대해 털어놓아 볼까.

그렇게 턱을 쥐어짜면서 고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난 이 글에 무엇을 기대하나?". 그러니까 "이 글이 엄청나길 기대하나?" 하고 스스로 묻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0.1초쯤 지나 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엄청난 걸 기대하지 않아. 그냥 무난하게만이라도 써졌으면 좋겠어. 무사히 끝맺기만 해도 난 만족!" 이 대답을 얻고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해 벌써 세 문단까지 오게 됐네요.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글을 붙잡고 하루에 얼마라도 쩔쩔매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그게 무엇이든 기대감 자체가 낮아진 것 같습니다. 허망한 기대보다는 알찬 평범함이 더 값진 미덕 같다고 생각하게 됐지요. 삶도 그렇습니다.

"난 내 삶에 무엇을 기대하나?" 하고 생각하며 이리저리 미래 모습을 그려봐도 어째 무난한 모습만 그려집니다. 괜한 기대를 품었다 실망하게 될까 봐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만(제 무의식은 저도 잘 모르니까요), 그보단 삶이라는 게 원래 기대하는 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레 '무난, 무난'을 외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삶이 내게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잖아요. 어차피 전 살면서 어느 면에선 깊은 우물 같은 결핍을 느낄 테고, 어느 면에선 미소 지을 만한 만족에 이를 테고, 또 어느 면에선 죽어라 실패만 할 테고, 어느 면에선 누구보다 고집스럽게 집착을 부리겠지요. 내 하루를 채워주는 모든 것들이 내게 호의적일 리도 없고, 또 그렇다고 모든 순간순간이 나를 밀어낼 리도 없으며, 마냥 행복에 겹지도, 마냥 불행에 빠지지도 않을 테지요.

하지만 단 하나의 가닥에 대한 기대는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먼 미래의 어느 시점,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던 여러 가닥 중 단 하나의 가닥만이라도 나를 밀쳐내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모든 걸 주지 않는 게 삶의 속성이라면 행복한 사람이란 이 하나의 가닥만이라도 끝까지 손에 쥐고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윌리엄 스토너도 그리 비극적인 삶을 산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넌 삶에서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질문에 '실패'가 아닌 '인생'이라는 답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비극적 삶을 산 남자의 이야기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표현하는 수식어들은 대개 이렇습니다. '조용한 비극', '절망적인 생애', '슬픈 걸작'. 삶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조용히 받아들인 윌리엄 스토너. 그의 이런 태도는 스토너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슬픔에 빠져 있던 부모에게 자연스레 물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못 배우고 요령 없던 가난한 농부 부모는 언제나 지쳐 있었고, 그들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단 하나, 살기 위해서는 늘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소설을 통틀어 제게 가장 슬픈 문장은 스토너 부모를 설명한 아래의 문장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본문 중에서

부모를 도와 어렸을 때부터 노동을 해야 했던 스토너의 등은 열일곱 살 때 이미 아버지처럼 구부정해집니다. 쓸쓸한 집안 분위기를 따라 쓸쓸한 아이가 되고 만 그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미주리 대학 농과대에 진학하지요. 농과 대학에서 배운 신기술이 어쩌면 가혹하리만치 질긴 그들의 가난과 노동을 그들의 삶에서 한꺼풀이라도 벗겨내 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스토너에게도 주어진 삶을 의문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과 부모를 향해 모진 말을 해대며 원망을 퍼부울 수도 없었을 겁니다. 선하고 조용한 성정을 지닌 스토너는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심하고 무감각한 태도를 견지해 나갑니다. 모든 것에서부터 한 발 떨어져 나와 스스로를 어둡고 고립된 공간으로 피신시킨 뒤, 이 공간에서 그는 자기 자신 포함 모두를 해하지 않음으로써 보호하려 합니다.

저기 앞에 문이 있기에 뚜벅뚜벅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처럼 스토너도 하루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노동과 공부에 성실히 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토너는 살면서 처음으로 의미심장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요. 어렵기만 한 영문학 수업 중에 아처 슬론 교수는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읊어 줍니다.

바로 그 순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닫고, 태어나 처음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 그 햇빛을 받은 친구 뺨의 솜털 등 눈 앞에 보이는 것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합니다. 호기심에 가득 차서 말이죠.

순식간에 낯설어진 세상은 스토너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스토너는 더 이상 농과대 수업을 듣지 않습니다. 이제 스토너가 정성을 다해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결과물을 수확해야 할 곳은 척박한 땅이 아닌 대학 도서관이 되었죠.

그의 삶은 훌륭했다!

문학을 향한 스토너의 열정은 스토너의 삶에 가능성을 선물합니다. 스토너는 미래를 향해 조심히 한 발 내딛고, 그의 성실함은 그를 평생 문학 속에 살게 해 주지요. 스토너는 교수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첫눈에 반한 이디스와 결혼도 하고 예쁜 여자 아이도 낳고요. 하지만 스토너의 인생은 이후로도 마치 어린 시절에 가난을 인내했듯, 많은 걸 인내해야만 하는 삶일 뿐이었습니다.

아내의 증오, 딸의 엇나감, 동료의 괴롭힘, 떠난 연인. 스토너는 학자로서도 명성을 얻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인정을 받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역시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에게 허락된 작은 공간에 움츠리고 앉아 오늘 하루치의 삶에 덤덤히 임할 뿐이죠.

너무나 선량한 사람이지만, 이 선량함의 결과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기에 독자들은 스토너의 선함에 마냥 공감을 보내지 못합니다. 그가 살기 위해 획득한 무심함과 무감각이란 도구는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파괴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는 파괴했는지도 모릅니다.

스토너라는 사람 자체가 지닌 그 무엇이 어쩌면 아내인 이디스를 그렇게나 극적으로 몰아붙인 것인지도 모르고, 무너진 딸의 삶 또한 그의 소극적인 자세가 원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의 삶은 정말 실패였는지도 몰라요.

스토너도 어렴풋이 압니다. 자기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는 것을요. 소설의 마지막에서 죽음을 눈 앞에 둔 스토너는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 본문 중에서 

스토너는 생각하죠. 우정을 원했지만, 우정을 완성하지는 못했노라고. 타인과 연결이 되고 싶어 결혼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노라고.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을 포기했야 했다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평생 무심한 교사였다고. 순수하게 살고 싶었으나, 타협하고 말았다고. 지혜롭고 싶었으나, 무지했을 뿐이라고. 나 스토너는 기대했던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노라고.

하지만 거의 저물어가는 정신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그는 다시 한번 더 그가 이 삶에서 기대한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의 삶은 여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실패는 그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일 뿐이었으니까요.

스토너의 삶은 여러 가닥의 이야기로 일구어졌습니다. 가닥들은 제각각이었죠. 중간에 끊어진 가닥들도 있고, 인내만을 요구한 가닥도 있으며, 아주 잠시라도 행복과 기쁨을 준 가닥도 있었습니다. 이 가닥들 대부분은 스토너 곁에 오래 머물지 않고 그를 끝내 멀리 했으며 그 후 스토너는 더 외롭고 쓸슬하게 됐지요. 그래서 독자에게 스토너의 생애는 절망적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을 딱 덮고 스토너의 삶을 다시 천천히 돌아보면 '스토너는 그리 슬픈 삶을 산 건 아니야'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의 삶엔 늘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그림자 곁엔 한 줄기 희미한 빛이 존재했었습니다. 그 빛들을 엮어 한 가닥으로 이으면 셰익스피어 소네트에 감응했던 한 수줍은 청년에서 사랑하는 문학을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치던 노련한 교수의 삶이 그려집니다.

저자인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고 말했는데요. 아무리 절망적인 삶이라 해도 그 속에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단 하나'가 있었다면, 그 삶은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덧붙이는 글 | <스토너>(존 윌리엄스// RHK/2015년 01월 02일/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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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2015)


#존 윌리엄스#스토너#절망#비극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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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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