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중구 관동에 있는 '관동갤러리'는 금·토·일요일에만 문을 연다. 운영자들이 다른 요일에는 현업에 종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자가 찾아간 월요일인 지난 6일에도 갤러리 문은 열려 있었고, 갤러리와 갤러리를 운영하는 부부를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본인인 도다 이쿠코 관동갤러리 관장은 작가이자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남편인 류은규 교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남편의 손님과 관장의 손님 몇 팀이 갤러리를 구경하거나 회의를 했다.
갤러리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전시돼 있는 작품을 보기보다 갤러리 곳곳을 둘러보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만들어져 9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은 일반 가옥이었다. 지난 2015년 기억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기억과 재생의 전시 공간인 '관동갤러리'의 도다 이쿠코 관장을 만나 이곳의 어제와 오늘, 내일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한국과 중국을 거처 인천에 정착하다
도다 이쿠코 관장은 30여 년 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로 유학을 왔다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일제강점기 역사를 공부하며 한국에 대한 관심을 넓혀갔다.
일본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던 도다 이쿠코 관장은 한국에서 일본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 기자로 활동하다 지금의 남편을 사진작가로 소개받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때였어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자가 별로 없을 때라 제가 여러 잡지와 신문사에서 청탁받아 글을 쓰고 있을 때였죠. 그때 남편을 만났습니다."1991년 결혼한 부부는 1993년 중국으로 건너가 8년간 살았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인 남편과 중국을 오가는 일이 많았다. 서울이나 경기도 군포 신도시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며 두 나라를 오갔다. 그러다 몇 해 전 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부부는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신도시 생활이 아이한테는 편하지만 이제는 굳이 신도시에 살 이유가 없어서 남편과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남편이 지리산 청학동 사진을 찍은 적이 있어서 그곳에 갈까도 얘기하다가, 부모님과 아이가 일본에 사는데 급한 일이 생겼을 때 가기가 힘드니까 포기했죠. 그러다 인천으로 왔습니다."중국에서 8년간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인천의 차이나타운이 좋았다. 고유의 향(香)이 났고, 분위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던 인천근대박물관 관장의 추천이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가끔 인천에 왔을 때 (인천근대)박물관 관장께서 자장면을 먹으면서 인천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주셨어요. 2013년 1월부터 인천에서 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차이나타운 근처도 알아보고 동화마을이 생기기 전인 송월동, 아트플랫폼 근처의 여러 곳을 돌아다녀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지만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보러온 집이 이곳이다.
"밖에서 볼 때는 일본 집 같지 않았는데 현관문을 여니까 어릴 때 살았던 집과 구조가 비슷해 깜작 놀랐어요. '이 집이 내 집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릴 때 살았던 집을 그리워했던 적도, 기억했던 적도 없었는데 인천에 이런 집이 있는 게 신기했고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그날 이 집으로 결정했죠."집수리하는 데 1년, 주변에서 궁전 짓는 줄 알아
부부는 2013년 5월 인천으로 이사했다. 외벽에 타일이 붙어있어 외관상 일본 가옥으로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일본식 주택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옥 여섯 채가 같이 붙어있는 '나가야' 집 중 하나였다. '나가야'란 한 지붕 아래 이웃집과 벽을 공유하는 서민주택이다. 그렇게 살다가 1년 후 옆 건물까지 매입했다.
"옆집에 중국인 서커스단 20여명이 살고 있었어요. 나가야 건물은 벽이 얇아서 옆집에서 얘기하는 소리까지 다 들리거든요. 우리는 중국에서 살다 왔으니까 그들이 전화하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시끄럽다기보다는 재밌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사하면서 집주인이 집을 판다고 해 우리가 샀죠."도다 이쿠코씨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은 지금의 집처럼 2층짜리 연립주택이었다. 그는 어릴 때 살았던 집에 대해 옆집 아이의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숙제를 했고, 간장이 떨어지면 이웃집에서 빌려왔던 정다운 기억이 있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 사는 게 즐거운 이유는 예전의 정다운 생활을 되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2014년 1월에 매입한 옆집은 그대로 쓰기엔 문제가 많았다. 건축가이자 일제강점기 일본식 가옥에 조예가 깊은 도미이 마사노리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와 의논했다. 그 교수는 기존 재료인 나무를 최대한 살리면서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쓰기 좋은 집으로 재탄생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도미이 마사노리 교수가 조건을 하나 제시했어요. 이곳을 학생들 실습현장으로 쓰겠다고요. 건축과 학생들이 나무를 한 번도 만지지 않고 책상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한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그렇게 시작한 공사는 1년이 넘게 걸렸다. 단순하게 집을 고치는 인테리어 개념이 아니라 철저하게 건축 보강작업을 하고 하중까지 정밀하게 계산했다. 90년 된 집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이 필요해, 설계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보통 이 동네에서 집수리를 하면 두어 달 정도 걸리는데 우리 집은 1년 정도 걸리니까 동네 사람들이 '안에 궁전을 짓느냐?'고 궁금해 했어요. 공사가 끝나고 와서 보니까 내부가 단순한 거예요. 하지만 전문가들은 왜 오래 걸렸는지 알죠."이 건물의 매력은 3층 다락방이다. 2층 천장을 뜯어 다락방을 만들었고, 그 방에 부부의 책을 모아 작은 도서관처럼 활용하고 있다.
"예전에 아파트에서 살 때는 부부의 작업공간이 따로 있어서 서로 무슨 책을 갖고 있는지 몰랐어요. 책을 한군데 모아보니까 같은 책이 있더라고요. 관심 분야가 비슷해 우연히 같은 책을 산 거죠. 제가 출판사도 하다 보니 책을 둘 공간이 필요해 설계할 때부터 다락방을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이곳에 앉아서 책을 읽고, 책을 읽다 잔 사람도 있습니다.""타인을 위한 공간이자 우리를 위한 공간"
주소가 '중구 신포로 31번길 38'인 관동갤러리는 도로명 주소 이전에는 '관동'이었다. 인근에 있는 중구청이 해방 후부터 1985년까지 인천시청으로 사용됐고, 지역에 관공서가 많아 '관동'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으로 도다 이쿠코 관장은 추측하고 있다. 지도에서 없어지는 지명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을 '관동갤러리'라고 지었다. 많은 기억과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이 새로운 창조와 공감을 낳는 공간으로 활용됐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갤러리 1층은 여러 물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만든 물건도 있고, 2층 갤러리에서 전시한 작가들이 판매용으로 두고 간 작품들도 있다.
"짐바브웨서 30년을 살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교육도 제대로 받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아프리카의 전통 음악과 예술을 가르쳐 자부심을 줄 수 있는 교육을 하고 있죠. 아트센터를 세워 전통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외국에 나가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갤러리에서 그 학생들이 만든 공예품을 판매하는데, 수익금은 전액 아이들에게 돌아갑니다. 여기에서는 어디 가서 살 수 없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재밌는 물건을 만날 수 있게 노력하고 있습니다."현재 갤러리 2층에선 19일까지 류은규 교수의 개인전 '대륙적 일상'을 하고 있다. 류 교수는 10년 전 중국 문화대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중국 사진가로부터 받았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발표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 사진작가는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이번 전시는 그 작가의 사진과 류 교수가 2005년에 제자들과 함께 문화대혁명 시대의 포즈를 재현해 찍은 사진을 비교할 수 있게 전시돼있다.
류 교수는 작가노트에서 "지금도 문화대혁명의 공과를 말하는 게 자유롭지 않은 이 때 중국사회가 갖고 있는 갈등의 단면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작품에 담았다"고 했다.
2층 갤러리에서는 오는 24일부터 3월 26일까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주제로 한 시화전을 열 계획이다. 일제강점기에 여성들도 독립운동을 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에 국가보훈처에서 여성들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해 독립운동가로 등록했지만,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2014년 12월 말 자료로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사람이 246명이다.
갤러리 어느 곳을 둘러봐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이 없어 보여, 걱정스레 물었다.
"이곳은 타인을 위한 공간이자 우리를 위한 공간이에요.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많죠. 공사를 열심히 했는데 왜 문을 잠가 두냐, 커피와 음식은 왜 안 파느냐는 둥, 질문을 많이 했어요. 우리는 이걸 하려고 만들었어요.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행복하죠. 눈앞의 수익을 바라보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사진작가인 류 교수는 예전부터 갤러리를 갖고 싶어 했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며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한다고 도다 이쿠코 관장이 들려줬다.
"작업만 하면 갤러리는 필요 없겠죠. 아파트에 살 때도 일본에 사는 지인이 많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집으로 오지 않고 식당이나 찻집에서 만나고 헤어졌는데, 그게 참 아쉽더라고요. 이런 공간이 있고 없는 건 큰 차이입니다. 또한 관동갤러리를 찾는 분들한테 이 동네의 역사까지 설명해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여러모로 소중한 공간입니다."도다 이쿠코 관장은 이곳이 자신들이 죽고 나서도 이 형태로 계속 이어져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하기도 했다.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이 집도 마찬가지죠. 사람은 잠깐 살면서 역사를 이어가는 다리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또한 이곳은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 3개국의 관계가 어려운데, 서로 모르기 때문이죠. 알면 쉽게 풀 수 있어요. 서민들의 사소한 생활물품도 문화의 산물이에요. 이곳에는 일본과 중국의 소박한 물건들이 많이 있어요. 미력하나마 이곳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