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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이 죽고, 17명이 중상을 입었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지난 2월 11일로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보호소 시설은 변한 게 없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사회의 시선 역시 변한 게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그간 가까이서 지켜봤던 피해자들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 기자 말

 이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목숨을 돈으로 바꾸려 드는 사람이 있다.
이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목숨을 돈으로 바꾸려 드는 사람이 있다. ⓒ pixabay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장26절

이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것은 진리요, 상식이다. 누군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 억만금을 안겨준다고 해서 한 생명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돈이면 다 된다는 세상에서 목숨을 돈으로 바꾸려 드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갯값'이나 다를 바 없이 취급해 놓고, 돈을 던지며 '나름 호의를 베풀었다. 꽤나 신경 썼다'고 목에 힘을 주면서 말이다. 꽤나 신경 쓴 돈이 설령 억만금이라 해 보자.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닌 고인에게 무슨 소용이며, 고인을 원하는 유족에게 위로가 되겠는가? 호의를 가장한 위로는 유족 가슴에 대못을 박을 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산재와 교통사고 등으로 사망했을 때, 고용주나 가해자들 중에 "목숨 값이나 받고 빨리 떠나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시신이 한국에 있어 봤자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난다며, 어떻게든 빨리 합의를 보고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합의를 강요하는 제3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사건 담당 경찰일 때도 있고, 보험사 관계자일 때도 있고, 고인의 가까운 친척일 때도 있다.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합의부터 하라던 교통사고 가해자

베트남인 뤼이청해씨 부부는 경기 광주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 중이었다. 회사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과속차량이 부부를 들이받았다. 멀리 튕겨져 나간 남편은 절뚝거리며 일어선 반면, 부인은 움직임이 없었다. 사고를 목격한 회사 사람들과 앰뷸런스에 의해 둘은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뤼이청해는 진료를 마치자마자 부인에게 달려가려다 지갑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그가 진료 대기 중일 때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은 그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뿐이었다. 지갑에는 현금과 외국인 등록증, 베트남 신분증이 있었다.

뤼이청해는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 준 회사 관계자에게 먼저 연락했다. 이어 경찰에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신고를 했다. 하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뒤 회사 관계자가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빨리 오지 않고 뭐하냐'며 다그쳤다. 망연자실하며 병원을 나서려 할 때 경찰이 느긋하게 나타났다. 경찰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면서 옆에 앉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가 버렸다. 돈보다도 신분증 때문에 걱정이긴 했지만 아내 일이 급했던 뤼이청해는 지갑을 포기하고 병원을 나섰다.

시신이 안치된 병원엔 회사 사람들과 경찰 말고도 모르는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 중엔 보험사 직원도 있었다. 가해자 측에선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지역유지들을 통해 회사와 경찰에 접근했다. 경찰은 "횡단보도에서 운전했기 때문에 쌍방과실이 된다"며 합의가 필요한 사건이라고 했다. 뤼이청해는 이미 한국경찰이 외국인이 당한 피해를 나 몰라라 하는 걸 경험한 터였다. 합의를 하지 않으면 운전자를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경찰의 으름장에 거의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런 뤼이청해에게 회사에서는 "보상을 조금이라도 많이 받으려면 빨리 합의하는 게 좋다"며 합의를 종용했다. 지역유지로 보이는 사람도 곁에서 "장례가 길어지면 그만큼 보상비에서 빠지니까…"하며 보상금을 강조했다. 빤히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이라는 걸 알면서 회사 관계자는 죽은 아내 덕택에 돈 버는 거 아니냐는 상식 밖의 말을 해댔다. 회사는 직원인 뤼이청해가 아닌 가해자 측 입장을 두둔했다.

"베트남에서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한국에서 결혼한 처지에 이런 보상이라도 어디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가해자가 무슨 죄냐. 너도 사람 죽고 떼돈 벌 거 아니잖아."

졸지에 아내를 잃고, 찰과상과 뇌진탕 증세에도 불구하고 견뎌보려던 뤼이청해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가해자 측에선 '아내 목숨 갖고 거래하는 사람' 취급하며 몰아세웠다.

심신이 지쳐있던 뤼이청해에게 도움을 준 건 현덕진 변호사였다. 이주노동자쉼터에서 소개해 준 현 변호사는 그때까지 외국인 교통사고 사망 처리 경험이 없었다. 그는 사건을 처리하면서 "사람 목숨을 왜 이렇게 차별하지. 이건 뭐 갯값이랑 뭐가 달라"라는 말을 한숨 쉬며 반복했다. 외국인은 사망 보상금이 본국 환율과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하는 탄식이었다. 내국인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상금을 지급하면서도 선심 쓰듯 유족을 몰아세우려던 가해자 측은 변호사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다. 그들은 장례비와 사망하지 않았으면 벌었을 예상 수입과 위자료까지 지급했다.

산재 여부를 따져 보겠다고 하니, 시체팔이 하지 말라

응웬은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민이다. 그는 외국인 고용허가제로 입국했다가 사망한 조카의 사망 보험금 때문에 친정과 조카 회사에서 어이없는 일을 경험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으로 한국에 온 지 십 년이 넘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베트남 이주노동자 영정 한국에서 사망한 베트남 이주노동자 영정에 꽃과 과자가 놓였다.
베트남 이주노동자 영정한국에서 사망한 베트남 이주노동자 영정에 꽃과 과자가 놓였다. ⓒ 고기복

2009년 4월. 응웬씨 조카가 용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조카는 응급처지도 받지 못하고 버스에서 숨을 거뒀다. 회사에서는 유해 송환하라며 이모인 응웬에게 연락했다. 조카의 죽음은 응웬에게 날벼락이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한국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조카였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남편은 처조카의 유해 송환에 관심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혼자 이곳저곳 수소문하면서 일을 처리해 나갔다. 유해는 화장하기로 하고 주한 베트남 대사관에 유해 송환을 의뢰했다. 대사관에서는 서류 발급 비용과 시신 화장 비용으로 칠백만 원을 요구했다. 응웬은 대사관에서 요구하는 비용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보험 처리가 된다는 말에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우선 지불했다. 대사관이 얼마나 뻑뻑하게 일을 처리하는지 모르는 남편은 보험금에서 빼면 될 걸, 왜 먼저 돈을 지급했냐고 난리를 피웠다.

응웬은 조카 일인데 남편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내심 서운했다. 그런데 남편보다 더 무섭게 닦달한 사람은 친정 사람들이었다. 조카는 입국하면서 외국인근로자 상해보험에 가입했었다. 유해가 송환되고 유족 보상비로 일천오백만 원이 유족에게 지급되었다. 유족 보상금이 지급된 사실을 확인한 응웬은 대사관에 지급한 금액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형편이 어려웠던 응웬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받았으면 했다. 그러자 친정에서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조카 목숨 갖고 장난치느냐"며 응웬을 못된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다. 친정집에서 응웬을 성토한 이유는 다른 이주노동자 사망자가 받았던 보상금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회사 일 끝나고 노래방에서 직원들과 놀다 죽은 사람도 삼천만 원 받았더라.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집에 가던 사람이 죽었으면 그보다 더 받아야 하는 게 맞지 않냐. 최소한 삼천만 원을 받았어도 서운한데, 고작 천오백 받아 보내놓고 돈 보내라니 양심이 있냐. 한국에서 잘 살면서 어떻게 조카 목숨 갖고 그럴 수 있냐."

자식을 잃은 언니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해도 응웬은 너무 억울했다. 회사 밖에서 죽은 사람이 삼천만 원을 받았다는 소리도 금시초문이었다. <외국인근로자 상해보험> 약관상 보상 금액이 최대 일천오백만 원이라고 명시돼 있어서 보상금액을 달리 조정한다는 게 있을 수 없었다. 응웬은 삼천만 원을 보상받았다는 사람이 일했던 회사를 수소문해 찾아가 본 후, 산재 처리를 하면 보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응웬은 조카가 일하던 회사를 찾아갔다.

"아, 무슨 우리가 사람을 죽였다는 거야, 뭐야? 이제 와서 산재 처리한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회사 밖에서 일어난 사고를 산재라고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무슨 시체팔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회사 담당자는 입에 거품을 물고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면서 삿대질을 했다. 산재 처리가 되는지 알아보자고 말을 한 것뿐인데,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통에 응웬은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노무사를 통해 산재 신청을 했지만 인과관계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선 지불한 칠백만 원과 노무사에게 지불한 돈은 어디 가서 청구할 방법이 없었다. 친정에 그간 사정을 세세히 이야기해도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자식 잃은 것도 억울한데, 왜 다른 사람보다 못 받느냐. 조카 목숨으로 돈 벌려고 하느냐"고 따지는 언니에게 보험 약관 규정을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응웬은 조카가 가는 길 노잣돈으로 썼다고 생각하고 친정과 정 끊고 살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조카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며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어디서 시체팔이 하고 다녀. 보험이 뭔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고 다니는 거야. 그러게 누가 돈 먼저 지급하래.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남편은 그간 친정 뒷바라지 하는 아내에게 쌓였던 화를 조카 일 때문에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런 남편에게 응웬 역시 한바탕 퍼부었다. 차분하게 말이 통하지 않는 친정 때문에 꾹꾹 눈물을 삭이던 응웬은 처조카 일이라고 무신경했던 남편에게 속에 담았던 말을 토해냈다.

"한국 직원이면 회사에게 그렇게 했겠어. 최소한 사망진단서 떼서 근로복지공단에 신청이라도 해 봤을 거 아냐. 당신까지 왜 그래!"

응웬은 설움과 답답함에 눈동자만 아니라 콧등까지 벌겋게 상기될 정도로 엉엉 울었다. 그리고 '한국인과 이주노동자, 무엇이 그리 다르단 말입니까?'라고 묻고 또 물었다.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⑦] 불법 사람이라 안 된다는 말…이의 있습니다.


#이주노동자#죽음#고용허가제#산재#사망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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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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