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기록이 깨졌습니다. 이번에는 무려 500만명입니다.
서울시 인구의 절반 가량이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삼일절이었던 지난 1일의 '탄핵무효 애국집회'이야기입니다. 이날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는 부산시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인구가 500만명 정도인 노르웨이, 아일랜드, 코스타리카,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나라 인구 전체가 광화문광장 일대에 집결한 것과 맞먹는 규모라 합니다. 해외토픽에 나올 법한 진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명 '태극기 집회'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이쯤되면 지난해 대한민국 전역을 휘감았던 촛불집회는 명암조차 내밀지 못할 지경입니다. 이날만 해도 촛불집회 참석인원은 30만 명(주최측 추산)인데 반해 태극기 집회는 500만 명에 달했습니다. 태극기가 촛불을 집어 삼킨 형국입니다.
태극기 집회의 뜨거움은 단지 숫자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집회 현장 이곳 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격앙되고 앙칼지며 격렬합니다. 그들의 얼굴은 전장에 나서는 군인처럼 맹렬한 투지와 결기로 가득합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스스로를 '애국보수'라 칭하고 있습니다.
탄핵 반대하는 사람들의 결사체 '태극기 집회'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어딘가 그 결이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애국보수란 말은 '자기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애국', '보전하여 지킨다'는 의미인 '보수'가 결합한 합성어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사람들이 애국보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태극기 집회에서는 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태극기 집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결사체입니다. 따라서 집회의 목적은 오직 탄핵 위기에 빠진 '박근혜 구하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들은 대통령 탄핵이 좌파세력의 기획된 음모이며 내란 선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뜯어보면 대통령을 곧 국가라 여기는 전근대적 사고가 묻어납니다. 대통령이 국가이므로 그런 대통령을 쫓아내려는 책동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자 내란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만일 대한민국이 절대왕정이나 독재국가였다면 그들의 주장에도 나름의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체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화제에서 국가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의 위임과 동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정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아닙니다. 잘못을 했으면 대통령이라 해도 처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박 대통령이 탄핵심판을 받게 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은 헌법질서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이 위임한 공적 권력을 최순실 일당과 사사로이 공유하기까지 했습니다. 민주공화국 체제의 근본과 질서를 뿌리째 뒤흔든 것입니다.
따라서 애국보수들이 바로잡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헌정질서이며 국기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한다면 민주공화국의 국가시스템을 무너뜨린 국정농단 세력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응급차 가로막고... 폭력 난무하는 태극기 집회
지난달 25일 태극기 집회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이날 집회에서 시민 한 명이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태극기 집회에서는 이같은 폭력과 폭언이 비일비재합니다.
더욱 황당한 상황은 그 이후에 벌어졌습니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부상 당한 시민을 후송하기 위해 출동한 119 응급차를 가로막는가 하면, 손에 들고 있던 태극기와 주먹으로 구급차의 유리창을 두드리는 등 환자의 후송을 방해하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태극기 집회의 폭력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취재를 나온 기자, 심지어 경찰까지 폭행하는 안하무인과 막무가내식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집회 현장에서도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 "좌파 척결", "잡아 죽이자" 등의 살벌하고 섬뜩한 구호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박사모 등의 게시판에서는 헌법재판관에 대한 살해 협박, 특정 정치인에 대한 암살 계획, 특검에 대한 테러 주장, 내란 선동 등의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할복단을 모집한다', '준비물은 30cm 이상 회칼, 흰장갑, 유언장' 같은 공포심을 유발하는 반사회적인 글들이 게시되기도 합니다.
이 모습 그 어디에도 보수의 가치인 따뜻함과 배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평화와 공존, 약자에 대한 연민 또한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배격하고 공격하는, 과격하고 호전적이며 폭력적인 광기 어린 모습만 부각되고 있을 뿐입니다.
태극기 집회 전과 후의 모습도 확연히 다릅니다. 애국보수의 상징과도 같은 태극기는 집회가 끝나면 어느새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립니다. 태극기가 민심이라더니 인도, 버스정류장, 쓰레기통 등 도심 곳곳에서 태극기가 버려진 채 나뒹굴고 있습니다. 태극기 집회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수의 길은 무엇이며, 보수의 가치는 무엇입니까이처럼 대한민국 애국보수들이 총결집했다는 태극기 집회에서는 보편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500만 명이 모였다는 집회 규모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실 없는 허세이자 허풍이라는 것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태극기 집회에 대한 우려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합리적 이성과 보편적 상식을 뛰어넘는 반사회적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와 함께 대한민국 보수의 가치 역시 급속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헌법가치와 민주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헌정질서를 농단한 세력을 비호하는 일이 보수의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배척, 극단적 광기와 폭력이 보수의 미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는 개혁의 흐름을 가로막는 것도 정상적인 보수라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대관절 세상 어디에 이런 보수가 있단 말인가요.
여기저기서 보수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변변한 대선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막막하고 암담한 현실을 반영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정작 따로 있습니다. 보수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 심각한 위기입니다. 보수가 내세우던 두 개의 축인 경제와 안보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린 지금, 보수의 가치마저 사라지게 되면 그들의 존립기반 자체가 공중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보수의 길은 무엇이며, 보수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보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보수의 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