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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보복'과 유사한 분위기가 86년 전의 중국에도 있었다. 일본이 만주 침략을 목표로 최후의 태세를 정비하던 1931년이었다. 이 해, 중국 길림성 장춘현의 만보산에서 조선인과 중국인들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이것이 1931년 판 사드 보복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해 4월 만보산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은 수로 공사를 벌였다. 그러자 중국 농민들은 자기네 콩밭이 망가지고 땅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다. 조선 농민들은 항의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자 7월 2일, 중국인들은 집단으로 몰려가 힘으로 공사를 저지하려 했다.  

양측 농민들의 패싸움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이 사건에 엉뚱한 세력이 개입했다. 중국에 주재하던 일본 경찰들이었다. 그들은 사건 현장에 갑자기 나타나, 총을 쏘며 공포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고는 중국인들을 내쫓았다. 발포가 있기는 했지만, 이날 충돌은 이렇게 유혈사태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도 히로히토 일왕(현재 일본왕의 아버지)을 떠받드는 일본 정부는 사건을 위험한 방향으로 키웠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을 동원해서 '조선인 이주민들이 중국인들한테 집단 폭력을 당했으며, 위험에 빠진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도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조작했다.

이런 왜곡 보도는 조선에서 반(反)중국 감정을 확산시키고, 중국에서도 이에 맞선 반조선 감정이 확산되도록 만들었다. 항일투쟁으로 연대해야 할 조선과 중국 두 민족이 상호 대립하는 분위기가 조장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만보산 사건이다.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이 의도한 것은...

 1935년의 히로히토.
1935년의 히로히토.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1931년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다. 일본은 1894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데 이어,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까지 승리를 거두면서 동아시아 패권을 잡았다. 1914년 이전에 동아시아 침탈에 적극적이었던 영국·러시아·독일·이탈리아 등이 제1차 대전을 계기로 동아시아 활동의 비중을 줄이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극대화됐던 것이다. 

히로히토가 군림하던 당시의 일본은, 일본열도 외에 타이완·오키나와·대마도·조선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었다. 이때의 일본은 일본 역사상 최강의 상태였다. 그런 일본의 다음 계획에 활용된 게 바로 만보산 사건이다.

일본이 의도한 것은,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민족 감정이 악화되어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두 민족이 충돌하는 것이었다. 조선인은 법적으로 일본 국민이므로, 이런 상황이 확산되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만주에서 군사행동을 벌일 수 있다는 게 일본의 계산이었다. 이에 더해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 연합투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도 그들의 계산이었다. 그래서 만보산 사건을 과장해서 식민지 조선에 보도했던 것이다. 

사실을 침소봉대한 왜곡 보도가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조선 각지에서는 화교 상인들에 대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1882년 처음 진출한 이래 조선 상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화교 상인들에 대해 조선인들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만보산 사건이 왜곡되게 알려지자, 중국 상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공격이 폭발했던 것이다.

평소에 조선인이 셋만 모여도 단속을 하던 일본 경찰이었다. 그런데 1931년 7월에는 조선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집단행동을 해도 그냥 방관만 했다. 언론에서는 반중국 감정을 조장하고 경찰은 중국인에 대한 폭력을 묵인하는 속에서, 중국 상인들의 피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이런 상황은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에 악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언론과 일본 경찰의 응원과 비호 속에 중국인을 공격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은 '조선인은 일본인의 2중대'라는 느낌을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이 일본을 등에 업고 중국을 압박하는 것 같은 이미지가 중국인들의 뇌리에 입력됐던 것이다. 

그 같은 부정적 인식은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의 신변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조선에 사는 화교들이 당한 것만큼은 아니어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도 현지인들한테 폭력을 당했다. 개중에는 살해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지키고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려는 것에 대한 맞대응으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가하는 '사드 보복'. 바로 이에 비견될 만한 상황이 1931년 중국에서도 벌어졌던 것이다. 한국이 미국을 등에 업고 중국을 압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대해 중국인들이 감정적 대응을 하는 것과 유사한 일이 그때도 있었던 것이다.

'1931년 판 사드 보복 공포' 몸으로 체험한 두 여성

1931년 판 사드 보복의 공포를 몸으로 체험한 두 여성이 있었다. 한 사람은 민갑완이었다. 황태자 이은(훗날의 영친왕)의 약혼녀였다가 일본의 훼방으로 파혼을 당한 뒤 상하이로 도피한 사람이다. 그도 사드 보복을 경험했다. 그의 남동생인 천행이도 마찬가지였다. 민갑완의 회고록인 <백년 한>에 그것이 소개되어 있다. 지금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라는 제목으로 바뀐 회고록이다.

"실정(실상)은 접어두고 외형만을 침소봉대하여 선전을 한 일제의 꾀에 넘어가, 양국 민족들은 서로가 원수를 삼고 국내외에서 살상자들을 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있던 우리 교포들도 한동안은 거리를 마음 놓고 못 다녔기 때문에, 천행이의 학업도 중단을 시키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상하이에 있었던 또 다른 여성도 그때의 경험을 회고록에 남겼다. 민갑완보다 3년 늦게 태어난 독립운동가 정정화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밀사 역할을 하며 국내에 잠입해 모금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회고록인 <장강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였다... 임정(임시정부)이 있는 프랑스 조계의 중국인 이웃들은 대부분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려 했으나, 화교들이 국내에서 박해를 받는데 그곳에 있는 우리가 받는 대접이 좋을 수는 물론 없었다... 상해(상하이)의 일반 중국 시민들의 한인에 대한 감정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반짝했던 독립운동은 1931년 당시에는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에 사람도 안 모이고 돈도 안 모였다. 이런 상태에서 독립운동기지인 중국에서 만보산 사건으로 반조선 감정이 확산됐으니, 독립운동이 최악의 위기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엔 노동자 밤엔 플레이보이였던, 서른 두 살의 청년

 1931년 당시의 이봉창.
1931년 당시의 이봉창.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만보산 사건이 터지기 6개월 전이었다. 1931년 1월이었다. 독립운동 침체로 위축된 상태에 빠진 상하이 임시정부 사람들은 낯선 '플레이보이'의 출현으로 곤욕을 겪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갸름하고 웃음기 넘치는 얼굴'에 '뒤로 빗어 넘긴 올백 머리'를 한 상태에서 긴 코트를 입은 007 스파이의 모습으로 세계 언론에 알려지게 될 인물이었다. 바로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태양이 떠 있는 동안은 점원이나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고, 달이 떠 있는 동안은 유흥업소에서 이성을 유혹하는 생활을 해온 서른두 살 청년이었다. 그런 청년이 느닷없이 나타나, 자기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임시정부에서 한동안 소란을 피웠다.

이봉창은 일본어 발음이 탁월했다. 거의 원어민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어떤 때는 일본 나막신을 끌고 임시정부 청사에 들어갔다. 그랬으니 독립운동가들이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손에는 봉지가 들려 있었다. 술과 안주를 넣은 봉지였다. 임시정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웃음기 띤 얼굴로 술과 안주를 들고 찾아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봉창은 임시정부를 임시정부라고 부르지 않았다. 일본인들처럼 가(假)정부로 불렀다.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가정부란 표현은 임시정부로 해석될 수도 있고 가짜 정부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런 뉘앙스의 차이를 모르는 이봉창이 '저도 가정부에 끼워달라'며 당당하게 요청했으니, 임시정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봉창을 받아준 이가 바로 백범 김구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은 "노동하는 사람은 독립운동 못 합니까?"라며 김구에게 쏘아붙인 데 이어 "저는 이제까지 육신의 쾌락을 위해 살았지만, 앞으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합니다"라며 김구를 설득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왈칵 쏟아낸 김구는 그를 좀 더 관찰한 뒤에 히로히토 암살 임무를 부여했다.

영원한 쾌락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순간의 쾌락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이봉창은 김구를 만난 후에도 술과 이성을 포기하지 못했다. 히로히토 암살을 위해 일본에서 3주간 사용하라며 김구가 마련해준 중국 돈 300위안도 일본 도착 4일 만에 유흥비로 탕진할 정도였다. 김구가 추가로 보내준 100위안을 아껴 쓰다가, 거사 전날인 1월 7일 밤에는 일본 기생집에서 거금을 사용할 정도였다.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은 이봉창의 거사

 이봉창의 생가가 있었던 곳. 서울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다.
이봉창의 생가가 있었던 곳. 서울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다. ⓒ 김종성

그렇게 일본 기생집에서 밤을 새운 이봉창은 좀 전에 언급한 007 차림으로 거리에 나갔다. 그런 뒤 히로히토가 행차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서 있다가 수류탄을 던졌다. 그는 두 번째 마차가 히로히토의 마차일 거라고 예상하고 던졌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다.  

이봉창의 거사는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또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2중대가 아니며 조선인 역시 일본에 맞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인식을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심어주었다.

인식이 바뀌자 중국 정부도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나섰다. 한때 조선인을 싫어했던 중국인들도 조선을 응원하고 후원하게 되었다. 만보산 사건으로 촉발됐던 '사드 보복'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힘입어 활력을 되찾은 한국 독립운동진영은 일본과의 최종 대결을 향해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1945년 해방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봉창의 한 방이 그런 엄청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동아시아 패권을 강화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고자 일본이 벌인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1931년 판 사드 보복이 발생했지만, 이것은 이봉창의 한 방으로 말끔히 해소되었다. 이봉창의 거사는 조선은 일본과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오해를 씻고 조선인과 손을 잡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돕게 됐던 것이다.


#사드 보복#이봉창#만보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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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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