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동창과 카톡을 하는데, 옆에 누가 있다고 알려 왔다.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아는 척하기도 뭐해서 "우리 초등학교 동창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얘가 뭐라 한다"였다. 어떻게 동창을 몰라볼 수 있느냐는 섭섭함이 묻어났다.
만나고 헤어지고, 추억을 가슴에 묻으며 사는 게 사람이다. 추억도 오래되면 색이 바래는 게 인지상정이고 잊힐 수 있다. 그런데 동창이라는 이름은 다른 걸 요구했다. 졸업 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연락이 없었다고 해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는 건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이름마저 가물가물하다'는 말 한마디에 졸지에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래, 그 녀석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 하는 친구가 고향에 있어 기분 좋다"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동창의 기대를 짓밟은 죄가 너무 컸다.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도 아닌데, 세월은 기억을 퇴색시켰고,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너무 늦기 전에 동창들 얼굴 보러 고향을 찾아야 할 성 싶다.
숱한 이주노동자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보면 대체로 기억은 세월과 비례한다. 그러나 고작 몇 번 만남을 가졌을 뿐인데도 잊을 수 없는 이름과 얼굴이 있다. 서로 말이 안 통해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지만, "그 사람, 어떻게 살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을 덜어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12년 전, 산본 원광대병원에서 만났던 반둥이 그런 사람이다.
'허혈성 장염', 병명도 생소했다. 갑자기 심한 복통과 혈변이 묻어나는 설사로 입원한 반둥에게 의사는 '젊은 사람에게 흔치 않은 병'이라고 했다. 더불어 대장 혈액 순환이 나빠져 산소와 영영분이 공급되지 않아 궤양과 염증이 생겼기 때문에 수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갑작스런 수술로 병원비가 없었던 반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두 번 만났다. 첫 만남은 수술이 끝난 직후였고, 그 다음은 퇴원하던 날이었다.
반둥은 베트남 중부 응에안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둥이 퇴원하던 날, 그 어떤 베트남인도 병원에서 볼 수 없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병원비를 책임져 주겠다고 했던 고향 동생들이 법무부 출입국 단속에 걸려 화성 외국인보호소에서 강제 추방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같은 지역사람이 한꺼번에 단속에 걸린 걸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 사이에서 "신고한 사람이 응에안 사람이다"는 말이 나돌았다.
원체 깡말랐던 반둥은 수술로 더 여윈 상태였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그냥 두지 않겠다"며 이를 갈았다. 누가 밀고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냥 두지 않으면 어쩔 거냐는 말에 반둥은 당연하다는 듯이 "베트남에선 배신자를 그냥 두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반둥이 배신자로 의심하는 사람은 응우웬 꿕 비엣(31)이었다. 2005년 4월 11일, 비엣은 금천구 가산동에서 단속에 걸려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보호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풀려났다. 문제는 그 다음에 불거졌다. 평소 비엣과 친분이 있던 응에안 출신들이 주로 근무하는 공장들에 출입국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반둥은 비엣이 풀려날 즈음해서 단속된 응에안 사람이 26명이라고 주장했다. 그 중에는 예식장까지 잡아놓고 결혼일자만 기다리던 동생도 있었다. 그는 설령 본인이 용서한다 해도 추방된 사람들이 가만 있겠냐고 물었다.
출입국 강요 때문에 프락치 활동하고 죽으려고 했던 비엣비엣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수차례의 협박 전화를 직접 받았고, 한 번은 결혼을 약속한 애인 집에 있을 때, 응에안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걸 보고 도망쳤다. 게다가 베트남에선 부모님이 동네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보복을 당할까 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렸다.
만남을 거부하던 비엣이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겠다고 연락을 해 온 건,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언하던 반둥의 설득 때문이었다. 반둥은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고향 동생들을 다독이며 보복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비엣에게 연락했다. 비엣은 죽으려고 마음먹었다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당신도 피해자라는 걸 안다"고 문자를 보내놓고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화만 보고 있을 때, 직접 찾아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주노동자쉼터에서 그를 만났다. 주섬주섬 기억을 떠올리며 그간 사정을 털어놓는 그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출입국 직원이 친구들 이름과 일하는 곳을 대면 풀어준다고 했어요. 나중에 단속에 걸리면 연락하라면서 핸드폰 번호를 적어줄 때, 아! 이젠 한국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짧은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너무 큰일을 저질렀어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죽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죽이겠다고 하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제 죄가 너무 무겁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후회해요."
출입국에서 프락치를 활용해서 단속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군사정권에서나 있던 일이라고 알고 있던 프락치 공작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법무부 출입국은 우리 사회 가장 약자로 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프락치 공작을 해놓고도 단속 절차에 따른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놨다. 하지만 '협박과 회유'로 동료를 밀고하게 하고, 인간성을 좀먹게 한 프락치 공작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다.
4개월간의 조사 결과는 비엣이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출입국은 비엣에게 밀고를 강요했고, 다른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 적발했다는 이유로 그를 풀어주었다. 평소 '법, 법'하던 법무부는 헌법이 정한 적법절차를 무시했다. 그들은 법 위에 군림했다. 담당직무를 수행하면서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는 국가공무원법 제56조 성실의무를 위반했다.
게다가 단속된 다른 미등록자들을 기만하기 위해 비엣에게 보호 명령서나 긴급보호서를 발급하지 않고 보호실에 하룻밤을 가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프락치로 활용한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는 소홀했다. 단속된 이주노동자들은 출입국이 자신들의 이름과 회사 내 인원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데다, 비엣이 단속 후에 풀려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가 밀고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결과 비엣은 신변안전에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인권위 침해구제위원회는 '불법체류자 밀고 강요에 의한 인권침해' 진정 사건 결정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출입국 직원은 불법체류자 20명의 명단 제공을 유도하기 위해 강제퇴거 대상자라는 절박한 상황을 이용하여 피해자 응우웬 꿕 비엣을 회유, 협박했다. 이는 헌법 제10조, 제11조, 제12조 및 제19조 등에 보장된 인권을 침해한 행위다. 피해자에게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동향 친구 등을 비롯하여 동료들을 밀고하도록 강요한 출입국의 행위는 우리 헌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정신적 기본권의 하나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했다. 또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8조 제2항에도 위배된다." 조사 결과에 따라 인귄위는 서울출입국관리소장에게 담당공무원 및 관리자를 경고 조치하고, 소속 직원에 대해 자체 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비엣의 밀고로 단속된 사람들은 강제 추방되고 말았다. 비엣 역시 국내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베트남으로 귀국했다.
결국 이주노동자 프락치 공작 논란은 사실로 판명되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있지만, 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구제가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프락치 낙인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비엣도 피해자사람들 눈을 피해 베트남으로 귀국한 비엣은 고향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호치민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부모로부터 들은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부모님은 "동네에서 너 때문에 빚도 못 갚고 추방됐다고 난리다. 나타나기만 하면 죽인다더라"며 자식을 원망했다. 그 동네는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의기투합해서 한국으로 떠났던 사람이 14명이나 되었다. 좁은 동네에서 프락치 밀고 피해자들과 그 가족의 원망을 비엣 부모는 오롯이 짊어져야 했다.
비엣이 귀국할 즈음에 이주노동자 프락치 사건이 있었음을 확인시켰던 반둥 역시 귀국했다. 대부분의 비엣 동네 사람들이 송출 비용을 다 갚지 못한 상태에서 추방되어 허름한 대나무 집을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달리 반둥은 번듯하게 집을 지었다. 그것도 응에안에서 유명한 끌로 해수욕장 앞에 하얀 대리석으로 벽면을 입힌 이층집이었다.
집을 다 짓고 반둥은 비엣 때문에 추방된 동생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동생들은 여전히 비엣에 대해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그들에게 반둥은 그간 사정을 거듭 말해줬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반둥이 한국에서 성공하고 돌아왔다고 다들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동생들 형편을 빤히 알기 때문이었다.
프락치 사건 당사자들이 다 귀국하고 잠잠해질 즈음 반둥이 연락해 왔다. 그는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라며 그간 소식을 전했다. 허혈성 장염 때문에 대장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 중이라고 했다. 비엣을 가만두지 않겠다던 그가 마음을 돌이킨 건 그런 이유가 있었다.
"비엣의 친구들은 가슴에 품은 독을 내려놓지 못했어요. 사람이 죽을 지경이 돼 보면 그 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란 거 알아요. 침대에 누워 해수욕장만 바라보는 사람을 보세요. 좀 너그러웠으면 좋겠는데, 피해 당사자들은 쉽지 않은 거 같아요. 비엣도 피해자라는 걸 받아들인다는 게…."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에 출입국의 프락치 공작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사회에도 충격이었다. 학생, 민주화세력들을 대상으로 했던 프락치 망령이 우리사회의 가장 약자라 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거 군사정권, 야만시대의 산물이었다.
이주노동자 프락치 공작으로 한 개인의 인생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엣은 고향도 마음대로 찾아갈 수 없는 절망을 겪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가슴에 독을 품고 원망과 비탄 속에 청춘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 사람, 어떻게 살고 있는지. 프락치 피해자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비엣과 화해했는지. 반둥은 항암치료를 잘 끝마쳤는지. 프락치 사건과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묻고 싶다.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벗어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