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이 오늘 결정된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지 92일 만이다. 헌법재판소는 10일 오전 11시 박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재판관 6인 이상이 '인용' 결정을 내리면 박 대통령은 즉시 파면된다.
파면이 결정된 박 대통령은 즉각 '자연인' 신분으로 돌아가 형사상 불소추특권은 물론, 경호와 경비를 제외한 모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반면, 헌법재판소가 '기각' 또는 '각하' 결정을 내릴 경우에는 박 대통령은 곧바로 직무에 복귀하게 된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기록됐던 박 대통령이 그 마지막에는 사상 최초로 탄핵 파면된 대통령으로 기록될지 여부가 결정되는 날인 셈이다.
사상 최초 기록 세웠던 '선거의 여왕' 박근혜
박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실로 화려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후 사실상 은둔 생활을 했던 박 대통령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후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더욱이, 차떼기 대선자금 사태와 탄핵 역풍으로 벼랑 끝에 몰린 한나라당을 진두지휘해 기사회생시키면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하긴 했지만 경선 패배 승복, 세종시 수정안 반대 등의 상황을 거치면서 '신뢰와 원칙'이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확보했다. 오히려 2011년 말에는 당의 '구원투수'로 재등장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고강도 쇄신을 단행해 총선 승리까지 거두고 '대세론'을 굳혔다.
18대 대선 승리는 그 화룡점정이었다. 박 대통령은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도 얻었지만 51.6%의 득표율을 얻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사상 첫 과반 득표를 기록한 대선 후보였다.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직에 올랐다는 점 역시 사상 첫 기록이었다. 같은 이유로, 청와대는 박 대통령에게 있어 34년 만에 돌아온 '집'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1주년을 맞아 역대 대통령의 지지율과 비교했을 때도 견고한 편이었다. 2014년 2월 여론조사 업체 '한국갤럽'이 역대 대통령 집권 2년 차 1분기 지지율을 비교했을 때, 박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60%)의 뒤를 잇는 역대 2위(56%)를 기록했다. 취임 후 최고 지지율은 67%. '한국갤럽'의 2013년 9월 2주 차 정례조사 당시 기록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등을 거치면서 차츰 하락했다. 탄핵 소추의 직접적 사유가 된 '최순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는 역대 대통령 지지율 중 최저치인 4%(2016년 12월 '한국갤럽' 정례조사)를 기록했다.
국정원 댓글·세월호 참사·메르스·사드... 숨가빴던 4년
67% → 4%. 숫자가 알려주듯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부터 정치·사회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여러 실책들을 저질렀다.
일단, 2012년 대선 당시 불거졌던 국가정보원 대선개입(댓글조작) 사건과 NLL 대화록 유출 사건은 정부 출범 후에도 계속 논란이 됐고, 이후 국회에서는 특위를 구성해 국정조사를 진행했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박 대통령 탄핵소추 사유로 포함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정부의 구조실패 책임이 불거졌고, 이후 박 대통령의 당시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은 특검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참사 직후 철저한 진상규명을 약속했지만 이를 위해 구성된 특조위 활동은 정부·여당에 의해 사실상 방해 받았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 안전'을 약속했다. 그러나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초기 대응 실패로 재차 정부의 무능함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기대 받았던 외교·통일 정책 쪽에서도 상당한 실망을 자아냈다. 취임 초 원칙 있는 대북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한반도신뢰프로세스'·'통일대박' 등을 내세웠지만 2016년 초 개성공단 폐쇄를 급작스럽게 결정하면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합의 역시 주요 실책 중 하나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위안부 피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 등 원칙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사자 동의 없이 10억 엔의 재단 출연금을 받고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해 버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오랜 인연을 맺었던 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기대를 모았던 한중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미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기로 결정하면서 한중 관계는 냉각기를 맞았다. 현재 중국은 우리나라 기업에 대한 경제적 압박에 이어 관광까지 금지하면서 본격적인 사드 보복 조치에 나선 상황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결정은 사회 갈등 심화의 대표적 사례다. 박 대통령은 사회 각계의 반대에도 이를 강행했다. 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쌀 수매가 현실화'를 주장하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사망한 백남기 농민 사건 역시 이와 비슷한 사례다.
2014년 '정윤회 문건', 2년 만에 태블릿PC로 되돌아 와 결정타
그러나 박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적으로 가른 것은 '최순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다. 당초 박 대통령의 비선실세 문제는 2014년 <세계일보>의 이른바 '정윤회(최순실씨의 전 남편) 문건' 보도로 세상에 알려질 뻔 했지만 '문건 유출 사건'으로 변질되면서 묻혔다.
이는 2016년 8월 미르·K스포츠 재단 강제모금 의혹이 불거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후 같은 해 10월 최순실씨 소유로 추정되는 태블릿PC에서 대통령 연설문 등 국정자료 유출 사실이 밝혀졌고,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으로 본격적으로 발화됐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 등을 통해 이를 진화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속속 드러나는 국정농단 정황들은 "이번 사태는 최씨의 사리사욕 탓이지 나와는 무관하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역대 두 번째 국회의 탄핵소추로 이어졌다.
박 대통령의 최종 운명에 대한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박 대통령보다 앞서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국회로부터 탄핵소추를 당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헌법재판소는 '중대한 법 위반'이 아니라며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한 바 있다. 다만, 박 대통령의 경우, 특검이 300억 뇌물수수 혐의를 확인했다고 밝힌 상황이다. 게다가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 범죄행위의 경우, 재임 중 형사소추가 면제되는 박 대통령을 제외한 관련자 대부분이 이미 기소된 상황이다.
이와 관련, 박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최후진술 의견서를 통해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든 소중한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모아 지금의 혼란을 조속히 극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헌재는 박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 선고를 TV로 생중계할 예정이다. <오마이뉴스>도 이 과정을 생중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