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1814년 3월 영국·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파리를 점령당했다. 나폴레옹으로 인한 프랑스 혁명이념의 전파를 우려하는 유럽 열강의 집단 공포심이 그렇게 표출되었다. 이에 따라 나폴레옹은 4월에 황제 자리를 잃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엘바 섬은 이탈리아 서해안의 북부에 있다. 프랑스 남부에서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가면 도달하는 곳이다. 나폴레옹은 형식상 그곳의 영주로 임명됐다. 연봉은 200만 프랑이었다.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치고는 꽤 괜찮았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폐위된 지 1년 만에 지위를 되찾았다. 1815년 3월 그는 파리에 입성해서 황제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되기는 하지만, 1815년 3월 당시의 나폴레옹은 '돌아온 황제', 영웅다운 인물이었다.
나폴레옹 떠받들었던 박정희한국에는 그런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처럼 떠받든 사람도 하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로 그다. 박정희 전문가인 정치학자 전인권(1957~2005년)의 <박정희 평전> 제1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이용문 장군처럼 예외적으로 존경할 만한 선배에게는 거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으로 대했다. 이는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및 일본 사회가 강조하는 몇몇 군사적 영웅에 대한 숭배와 동일시를 낳기도 했는데, 성인이 된 이후에는 히틀러를 좋아하기도 했다."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을 신처럼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가 나폴레옹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청와대 바깥의 정치학자 전인권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이 증언하는 것을 박근혜가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박근혜는 아버지가 존경하는 나폴레옹처럼 명예회복에 성공할 수 있을까? 자리에 복귀하지는 못하더라도 국정농단의 주범이라는 불명예를 씻고, 국민들이 그의 실체를 몰랐을 때의 그 명예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지난 12일 밤 삼성동 사저에 들어가면서 남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시사한 명예회복에 성공하여 나폴레옹의 감격을 느낄 수 있게 될까?
나폴레옹이 폐위를 당하면서 프랑스 부르봉 왕실의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1789년에 시작된 혁명의 와중에 붕괴했던 왕실이 다시 권력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루이 16세는 혁명 당시의 왕이고, 루이 17세는 루이 16세의 아들이고, 루이 18세는 루이 16세의 동생이다. 루이 17세와 루이 18세는 조카와 삼촌 관계다. 삼촌이 18세가 되고 조카가 17세가 된 것은 조카가 먼저 왕이 됐기 때문이다. 루이 17세는 루이 16세가 폐위된 뒤에 2년 동안 형식적인 임금 생활을 했다. 그 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다가 폐위되면서 루이 18세가 왕이 되었다. 루이 18세라는 칭호는 '부르봉 왕실에서 루이라는 이름을 갖고 왕이 된 열여덟 번째 사람이'라는 의미다.
루이 18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실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간다는 게 불안했다. 배를 타고 언제든 프랑스에 상륙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만 빼고 그랬다.
나폴레옹의 유배지가 엘바 섬으로 결정된 데는 러시아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거의 압력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그렇게 한 데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속내가 있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는 영국과 같은 편이 될 수 있어도,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같은 편이 될 수 없는 게 러시아였다.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를 재편한 1815년 빈(비엔나) 회의 이후로 러시아가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 지위를 다툰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러시아는 영국과 오래 친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엘바 섬에 유폐된 나폴레옹그런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멀지 않은 엘바 섬에 유배되는 게 유리했다. 그래야만 영국이 나폴레옹의 부활을 우려해서 거기에 정신력을 소모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로 러시아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 가게 되고, 이로 인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열강이 나폴레옹의 부활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두려움을 품은 것은 루이 18세나 유럽 열강뿐만 아니었다. 프랑스 국민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았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이들이 야유와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그래서 어떤 구간에서는 일반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호위하는 병사처럼 가장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프랑스 군주들에 관한 위인전 작가로 유명한 조르주 보르도노브(1920~2007년)가 집필하고 국내에서도 번역된 <나폴레옹 평전>에 따르면, 이동 중에 체류한 여관에서 나폴레옹은 여관 사장한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 사장은 자기 앞의 사람이 나폴레옹인 줄 몰랐다.
"그렇게 수완 좋은 인물을 프랑스에서 그렇게 가까운 섬에다 둔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그 사람은 전 유럽을 합한 것보다 꾀가 더 많잖아요. (만약 그를 독살하지 않으면)... 석 달 후에 그 인물이 돌아올 거예요."이 말을 한 사장은 여성이었다. 같은 남자한테 이런 말을 들었을 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 나폴레옹의 몸에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석 달 후에 돌아올 거'라는 사장의 말은 비슷하게 성취됐다. '석 달' 부분은 빼고 '돌아올 거'라는 부분은 성취됐다.
프랑스 황제에서 엘바 섬 영주로 격하된 채 직속 병사 1200명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한 나폴레옹은 세상의 우려를 불식시킬 목적으로 아주 성실하게 행동했다. 영국군 캠벨 대령의 감시를 받은 그는 "나폴레옹은 어디서나 행복하다"는 글을 벽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주거지를 손질하거나 지역 주민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일들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는 '탄핵인용 결정'에 완전히 승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쇼였다. "나폴레옹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 것 같다"는 말이 널리 퍼지고, 혁명 과정에서 지배층으로 급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이 루이 18세에게 불만을 품고, 자신의 유배를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빚는 틈을 타서,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군대를 거느리고 엘바 섬에서 탈출했다. 캠벨 대령이 3일 전 이탈리아로 가면서 엘바 섬을 비운 틈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엘바 섬 탈출한 나폴레옹 재기하다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달고 배에 올라탔다. 서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그는 영국 선박을 여러 차례 만났다. 배에 혁명의 깃발이 걸려 있고 무장 병력이 잔뜩 탑승해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영국 선박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갔다.
그런 행운을 누리며 프랑스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의 군대를 제압하고 11개월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3개월 뒤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영국에 항복하고 저 멀리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기 전까지, 나폴레옹은 무척 행복했다. 탄핵당한 지 11개월 만에 복귀한 '돌아온 황제'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황제 자리에 복귀하는 과정에는 영국의 의도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가까이 있는 게 불안했다. 영국이 유럽에 대해 안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자면, 그를 더 멀리 유배 보내거나 아니면 죽여 버려야 했다.
그러자면 명분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을 확실히 응징해서 재기 가능성을 밟아버릴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나폴레옹이 먼저 도발을 해줘야 했다. 그래서 영국은 마음을 비운 것처럼 행동하는 나폴레옹을 믿어주는 척했다. 캠벨 대령이 엘바 섬을 비운 데도 그런 고려가 작용했다. 영국 선박들이 나폴레옹의 배를 모른 척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그렇게 나폴레옹의 복위를 조장한 뒤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여 확실히 제압한 다음에 저 멀리 대서양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렇게 영국의 배후 조종이 있기는 했지만, 1815년 3월의 나폴레옹은 권좌에 복귀했다는 감격을 누릴 만했다. 어쨌거나 그는 자기 군대로 루이 18세를 제압하고 황위를 되찾은 영웅이었다. 영국의 의도가 드러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나폴레옹과 유사한 처지에 놓인 박근혜나폴레옹을 존경하는 아버지를 둔 박근혜. 지금 그는 엘바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동남쪽 엘바 섬에 유배됐듯이, 그는 청와대 동남쪽 삼성동에 유폐되어 있다. 경찰이 교통통제만 해주면 15분 이내에 청와대에 진입할 수 있는 거리에 그는 유폐되어 있다.
몸만 청와대와 가까이 있는 게 아니다. 심정적으로도 청와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청와대에 살면서 누렸던 영광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헌재의 탄핵인용 결정에 대해 불복하는 듯한 태도를 나타낸 데서도 그런 심리가 표출된다.
물론 헌재 판결은 '죄인'이 승복하든 불복하든 효력을 발휘하지만, 박근혜는 명예회복 혹은 뭔가를 의도하고 있기에 헌재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것 같다. 나폴레옹처럼 권좌와 명예 모두를 되찾는 것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명예만이라도 되찾고자 뭔가를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의 명예회복에는 정치적 투쟁과 승리가 필요하다. 박근혜를 고립시킨 지금의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박근혜를 욕하고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는 전제 위에서 새로 짜인 지금의 대한민국 분위기를 뒤엎으려면, 국회·헌법재판소·언론뿐 아니라 SNS 세계까지 박근혜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친박 지지자들의 시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뒤엎을 만한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친박 지지자 백만 명이 광화문을 점거한다 해도 그런 일은 벌어지기 힘들 것이다. 국민들은 촛불집회에 백만 명이 모이면 '5천만을 대표해서 백만이 광장에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친박집회에 백만이 모이면 '수구세력 전체가 총출동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친박집회를 아무리 열심히 연다 해도, 공연히 돈만 쓰고 힘만 소모하게 될 것이다. 그런 친박집회 외에, 달리 박근혜가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그가 명예회복에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거기다가 박근혜에게는 1815년 당시 나폴레옹이 갖고 있던 자산들이 하나도 없다. 폐위된 뒤에도 나폴레옹은 재기에 필요한 자산들을 갖고 있었다. 그것들이 박근혜한테는 없다. 그래서 박근혜의 앞날은 더욱더 어둡기만 하다.
1789년에 혁명이 발발할 당시만 해도 나폴레옹은 청년 장교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단시간에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한 것은 수구세력의 군사적 도발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혁명이념의 전파를 우려한 유럽 열강의 연합 공격도 막아냈다. 그런 공로를 발판으로 단시간에 통령이 되고 황제가 됐던 것이다.
그에 더해 나폴레옹은 통령과 황제로 있는 동안, 혁명 주역인 부르주아계급이 새로운 지배층이 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을 비롯한 혁명 지지자들이 루이 18세의 통치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프랑스 정치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폴레옹의 복위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또 나폴레옹은 1200명의 무장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이 복위에 도움이 됐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거기다가 국제정세도 그에게 틈을 제공했다. 그의 유배를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갈등을 빚었고, 비록 다른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그가 엘바 섬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영국의 역할도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비록 일시적이나마 나폴레옹은 명예회복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근혜가 가진 조건... 나폴레옹과는 다르다그런데 박근혜에게는 그런 자산들이 하나도 없다. 박근혜를 따르는 소수의 지지기반은 구시대 정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중소 규모 부동산이나 주식에 대한 지배권을 바탕으로 경제민주화 논리를 전파하며 언론 및 여야 정당을 상대로 재벌반대 입장에 서도록 압박하는 신흥 경제세력, 기성 언론이 아닌 SNS를 통해 새로운 정치이념을 퍼뜨리는 세력은 분명히 박근혜의 편이 아니다. 박근혜의 처지는 분명히, 떠오르는 신흥 세력을 기반으로 한 나폴레옹과는 다르다.
또 '박근혜판 엘바 섬 탈출'을 조장해줄 외국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은 박근혜·최순실이 동의한 사드 배치를 어떻게든 관철시켜야 하지만, 박근혜 없이도 그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박근혜 정부 덕분에 한국군과의 군사정보 공유협정을 체결하고 위안부 합의를 이룬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박근혜가 좀 더 오래 버텼다면 공유협정을 계속 연기하고 위안부 합의를 현실화시키기가 수월했겠지만, 일본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존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이 박근혜를 돕지 않으면 절대 박근혜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박근혜한테는 기댈 만한 외세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의 명예회복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12일 청와대를 나온 뒤 삼성동 사저 칩거에 들어간 박근혜는, 14일 아침 일찍 전속 미용사의 방문을 받았다. 지금 박근혜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몸 가꾸기가 아니다. 12일의 사실상 불복 선언이 경솔했다는 것을 뉘우치고 자신은 나폴레옹처럼 명예회복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신속히 깨닫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박근혜는 북쪽의 청와대로 가는 지름길보다는 서쪽의 검찰청·법원으로 가는 지름길을 숙지하도록 자신의 운전사에게 미리 일러둬야 한다. 그가 지금 자주 상의해야 할 사람은 미용사가 아니라 운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