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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무역 일로 중국 사업가를 만나면서, 중국에서 장사 일로 중국 고객을 만나면서, 중국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로 중국 선생님과 중국 대학생을 만나면서 알게 된 중국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되도록이면 제가 직접 경험한 일들을 쓰려고 합니다. 나무만 보고 산을 못 보는 우를 범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에 관한 개략적인 이야기는 인터넷에 넘쳐 나므로 저는 저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글을 풀어가겠습니다. 이런저런 분야에서 중국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의 피드백을 부탁합니다. - 기자 말

공자 고향 중국 산동성 곡부시를 찾는 관광객은 먼저 공자의 사상을 기리는 공묘(孔廟)부터 방문합니다. 그러고 나서 공부(孔府)에 가게 되는데, 공부는 공자 후손이 대대로 공자 고향 마을 시장(사또)으로 일하던 사무공간과 공자 후손이 살던 생활공간입니다.

 곡부시 공부
곡부시 공부 ⓒ 김기동

과거의 공자 후손은 공부(孔府)를 사무공간과 생활공간으로 사용했지만, 오늘날의 공자 후손은 공부(孔府)를 관광지로 사용합니다. 과거 문화유산을 관광지로 이용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실제 공부(孔府)를 방문해 보면,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관청과 고택에 왔다는 느낌보다는, 관광 기념품을 파는 시장판에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공부 정문 옆에 있는 ‘공부가주’술 광고
공부 정문 옆에 있는 ‘공부가주’술 광고 ⓒ 김기동

공부의 정문 옆에는 공자 집안 사람들이 만들어 마셨다는 술 '공부가주'를 선전하는 커다란 광고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가문 종손이 사는 고택을 방문했는데, 고택 대문 옆에 술 광고판이 세워져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공부 후원에 있는 생수 광고
공부 후원에 있는 생수 광고 ⓒ 김기동

또 고즈넉한 분위기의 공부 정원에도 커다란 생수 광고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복궁 정원인 향원정 한가운데 '삼O수'라는 생수 광고판을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거지요.

공자와 돈

만약 공자가 후손들이 이렇게 돈을 버는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요? 공자가 어떤 말을 할지 알아보기 위해, 공자가 논어에서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세계 4대 성인은 태어난 순서로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입니다. 이 네 사람 중에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와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가난을 경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목수였던 예수는 풍족하지는 못했겠지만,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열일곱 살 때 어머니마저 저세상 사람이 됩니다. 어려서 고아가 된 공자는 창고지기를 비롯해 남의 가축을 돌보는 허드렛일을 하며, 먹는 걸 걱정해야만 하는 세상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자수성가하여 성인이 되었으니, 공자는 인간적으로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에는 공자가 돈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이 많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건 어렵고, 돈 많은 부자가 교만하게 처신하지 않는 일은 의외로 쉽다'라고 말합니다. 부자가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지요. 인생 밑바닥에서 지독한 가난을 겪은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방법만 정당하다면,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말 채찍을 들고 수레라도 끌겠지만, 아니라면 내 좋은 대로 살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 채찍을 들고 수레를 끈다는 건 천박한 일에 종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공자 제자들이 쓴 ‘논어’
공자 제자들이 쓴 ‘논어’ ⓒ 출처:바이두

공자는 다른 성인처럼 세상을 등지거나 신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히 현실을 기반으로 올바른 세상을 만들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돈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공자 브랜드를 이용한 사업가 '자공'

공자는 사립대학교를 설립하고 변변한 수업료를 받지도 않고 삼천이백 명이나 되는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또 현재의 법무부 장관과 비슷한 '대사구'직을 관두고, 14년간 주변의 여러 나라를 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펼쳤습니다.

 14년 동안 주변 나라를 여행한 공자와 제자
14년 동안 주변 나라를 여행한 공자와 제자 ⓒ 김기동

그런데 이게 모두 돈이 드는 일입니다. 사립대학교를 운영하는 일이나, 제자를 데리고 14년간 여행을 하는 일은 실로 엄청난 경비가 필요합니다. 그럼 이 경비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다행히 공자에게는 '자공'이라는 사업가 기질을 가진 제자가 있었습니다. 공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자공'은 이런저런 사업 수완을 발휘해 경비를 조달합니다.

'자공'의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공자는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러 나라를 여행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건 '자공'의 경제적 도움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묘 대성전 건물에는 공자의 제자 16명의 위폐도 함께 있는데, 16명 중에 '단목사'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단목사'는 바로 '자공'의 원래 이름입니다.

논어는 제자들이 묻고 공자가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논어에 '자공'의 이름이 모두 서른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횟수입니다.

그러면 '자공'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까요? <논어>에는 '자공'이 보석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이런 기록을 근거로 중국 학자들은 '자공'이 공자와 같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석 판매 사업을 했을 거로 추측합니다.

공자는 '인(仁)'을 주장하면서 '인(仁)'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예(禮)'를 말합니다. 이런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의 정책으로 채택한 나라는 없었지만, 공자는 이런 사상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생각이 깊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을 겁니다. 조금 험하게 표현하자면, 공자는 유능한 사람은 아니지만, 남에게 사기 치지는 않을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은 거지요.

공자가 얻은 이런 신뢰의 평판을 브랜드화하여 보석 판매 사업을 한 사람이 바로 '자공'입니다.

전쟁을 치르며 나라가 없어지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춘추시대에 사람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했을 겁니다. 이런 아사리판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정직'이라는 이미지를 얻은 '공자'라는 브랜드는 특히 가짜가 많은 보석을 판매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이런 공자의 신뢰 이미지를 사업에 활용한 유능한 기업가입니다.

공자가 죽고 나서 제자들은 공자의 무덤 곁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했습니다. 3년이 지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떠났지만, '자공'은 혼자 공자 무덤 곁에 머물며 3년을 다시 시묘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공'은 6년 동안 공자의 무덤을 지킨 셈이지요. 공자를 모시는 '자공'의 정성이 대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자라는 브랜드를 독점하기 위해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자공’이 공자무덤 옆에서 6년간 생활한 공간
‘자공’이 공자무덤 옆에서 6년간 생활한 공간 ⓒ 김기동

 ‘자공’이 공림에 심은 나무
‘자공’이 공림에 심은 나무 ⓒ 김기동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孔林)에는 '자공'이 시묘를 하며 6년간 머물렀다는 건물(자공여묘처)과 '자공'이 공자 무덤 곁에 심었다는 나무(자공수식해)가 있습니다.

공자 후손들이 공자 브랜드를 사용하여 장사하는 모습

공자 후손들 역시 '자공'과 마찬가지로 공부(孔府)에서 공자 브랜드를 사용해 장사합니다. 브랜드의 이미지 유지를 위해 광고할 필요가 없는 공자라는 브랜드는 중국에서 최고 상표입니다. 공자 후손들이 이런 최고 상표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공자 75대 후손 가게 안내판
공자 75대 후손 가게 안내판 ⓒ 김기동

 공자 75대 후손 가게 내부 모습
공자 75대 후손 가게 내부 모습 ⓒ 김기동

공부(孔府)에 있는 건물 곳곳에서 공자 후손들은 공자 브랜드를 사용하여 장사합니다. 먼저 공자 75대 후손이 운영하는 가게를 소개합니다. 건물 앞에 공자 75대손 공양치 선생님의 서예 작품과 동양화 그림을 판다는 간판이 있습니다. 고객이 요구하면 75대손 공양치 선생님이 직접 고객의 이름으로 시를 지어 주거나, 도장을 새겨 주기도 한답니다. 공부(孔府)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합니다.

 공부 건물 복도에서 장사하는 공자 후손
공부 건물 복도에서 장사하는 공자 후손 ⓒ 김기동

공부(孔府) 건물 사용권을 얻지 못한 공자 후손은 관광객이 다니는 건물 복도에 서예 작품을 전시해서 판매하기도 합니다.

 공부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에서 장사하는 공자 후손
공부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에서 장사하는 공자 후손 ⓒ 김기동

공부(孔府) 건물 복도 사용권조차도 얻지 못한 공자 후손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에서 장사합니다.

 공부에서 공자 집안 특산품을 파는 공자 후손
공부에서 공자 집안 특산품을 파는 공자 후손 ⓒ 김기동

공부(孔府)에서는 공자 집안 특산품 음식도 판매합니다. 판매 상품을 소개하는 간판에는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직접 판매한다는 '공부팔공품(孔府八貢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공자 후손인 사장님은 청나라 시대 건륭 황제가 공부(孔府)를 방문하고 이곳에서 공부 집안 특산품을 먹어 보고 맛있다며'공부팔공품'이라는 이름이 지어 주었다고 소개하는 상술을 발휘합니다.

생활이 중요한지 지조가 중요한지

공자 74대 후손 공OO 선생님도 역시 공부(孔府)에 있는 건물에서 장사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공부(孔府)에서 장사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위치도 좋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유명해서 인지 상점을 드나드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공자 74대 후손 가게 입구
공자 74대 후손 가게 입구 ⓒ 김기동

상점 안에 본인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서예 작품이 한국에서 잘 팔린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본인 소개 안내판 글에는 중국 건국 50주년 서예전에 참여하여 1등 상인 금상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예전에 참여하면서 출품한 서예 작품의 글이 마오쩌둥의 시 '심원춘 설(沁園春 雪)'입니다.

 공자 74대 후손 소개 글
공자 74대 후손 소개 글 ⓒ 김기동

마오쩌둥의 시 '심원춘 설(沁園春 雪)'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시는 마오쩌둥이 1936년 대장정을 마치고 지었는데, 시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중국 산하가 웅장하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 부분은 마오쩌둥이 이런 중국 산하를 보고 감탄하여 역사의 영웅 진시황제를 생각하며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공자 74대 후손 공OO 선생님의 서예작품을 보면서 한국 사람인 저는 한국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시의 내용에 나오는 마오쩌둥이 진시황제를 생각했다는 내용입니다. 중국을 통일하여 혼란스런 춘추전국시대 700여 년을 끝낸 진시황제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진시황제는 공자의 유교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를 죽인 사람입니다. 공자의 후손이 조상인 공자의 책을 불사르고 유학을 핍박한 진시황제를 찬양하는 마오쩌둥의 시를 서예로 쓴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문화혁명 시절 파헤쳐진 공자 무덤과 깨진 비석
문화혁명 시절 파헤쳐진 공자 무덤과 깨진 비석 ⓒ 김기동

두 번째는 '심원춘 설(沁園春 雪)' 시를 지은 사람이 마오쩌둥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일으켰고 문화혁명 기간 홍위병에게 '모든 악귀를 쓸어 버리라'며 공자의 사상을 기리는 공간인 공묘와 공부 그리고 공림을 파괴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홍위병은 공자를 기리는 비석을 깨버렸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무덤까지 파헤쳤습니다. 그러니까 공자의 후손이 조상인 공자의 무덤을 파헤치도록 지시한 마오쩌둥의 시를 본인의 서예 작품 글귀로 쓴 거지요.

중국 친구에게 이런 저의 생각을 얘기했더니,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공자도 죽었고 마오쩌둥도 이미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 있냐"고. 참고로 마오쩌둥은 1976년에 죽었고 공자 74대 후손 공OO 선생님은 마오쩌둥의 '심원춘 설(沁園春 雪)' 시 서예 작품을 1999년에 썼습니다.

중국 사람은 돈을 버는 장사와 본인의 생활 철학을 전혀 다른 별개의 세상일로 분명하게 나누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중국여행#중국사람#중국여행#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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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사람이야기>,<중국인의 탈무드 증광현문>이 있고, 논문으로 <중국 산동성 중부 도시 한국 관광객 유치 활성화 연구>가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의 근저에 있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중국인과 대화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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