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을 한 해 앞둔 아내가 가수 국카스텐 굿즈를 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는 것을 보고도 혀를 찰 입장이 못 된다. 그나마 아내는 실존 인물을 좋아하는데 나이 쉰이 된 나는 가공의 인물을 흠모하고 연민을 느끼며 '굿즈'를 산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카스텐의 그것보다 더 비쌌다.
오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누구의 팬 노릇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이란 추리 소설의 주인공 '시노카와 시오리코'의 팬이 된 지 벌써 삼 년이 되었다. <로마인 이야기>와 조정래의 소설 <한강> 이후로 대략 1년을 주기로 나오는 다음 편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가 사서 읽는 소설이 <비블리아고서당 사건 수첩>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책'에 관한 책이기도 하고, 여자 주인공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자 주인공이로서니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연예인이 아닌 소설 속의 가공인물에게 매력을 느끼고 안녕을 걱정한다는 것이 웃기기는 하다. 책의 콘텐츠를 좋아할 뿐이지 책 속에 등장하는 가공인물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시노카와 시오리코'는 예외였다.
평소에는 수줍음이 많은 예쁜 처자일 뿐인 고서점 주인 '시노카와 시오리코'는 책에 관한 한 누구보다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끊임없는 수다를 발산하는 독특한 캐릭터다. 평생을 책방을 운영한 노인들이 들려줄 만한 희귀본과 출판에 관한 잡다한 지식을 긴 생머리를 가진 청순한 젊은 처자에게서 듣는 의외의 상황이 재미나다.
사람의 마음은 다들 비슷한지 이 소설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가 '시노카와 시오리코'를 흠모한 모양이다. '시노카와 시오리코'의 피규어가 출시되었고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뉴욕 양키스의 심장 '데릭 지터'의 그것만큼이나 성황리에 매진된 것으로 안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은 다르다고 한숨을 쉴 필요는 없다. '시노카와 시오리코' 같은 책방주인이 우리나라에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세렌북피티 책방>의 주인 김세나씨다.
<세렌북피티 책방>은 여러모로 특별하다. 출판사 편집자로 인연이 있던 그녀가 '콩만 한 책방을 냈다고 하기에 서점 이름을 '콩만한 서점'으로 하라고 조언을 했는데 그녀가 생각해둔 이름이 <세렌북피티 책방>인 모양이다. '우연한 행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책방 이름만 '우연한 행운'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서점을 찾는 고객들은 '우연한 행운'을 누릴 수밖에 없다. 책과 맥주를 함께 파는 서점이라서 놀라고, 고급 카페 못지않게 예쁜 인테리어에 놀라고, 책을 오래 읽고 가는 것을 눈치를 주기는커녕 편안하게 책을 읽을 읽도록 편의시설을 갖춰나서 놀라며, 책을 전시하는 세련된 감각에 놀라게 되리라.
내 딸과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동네 서점에 손을 잡고 놀러 갔을 때였다. 딸아이는 서점에 가면 꼭 소변을 보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동네 서점을 편안해 했고 이 책 저 책을 구경하고 읽었다.
나는 오랜 친분이 있는 사장님과 차를 함께 마시면서 딸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면 자식들이 보낸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사장님께 내밀면서 문제집을 달라고 하는 부모들이 드나들었다.
우리는 서점이란 이리저리 거닐면서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는 곳이어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함부로 남 욕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딸아이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보고 서점 주인에게 문제집을 달라고 하는 나를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김세나씨가 미리 정해둔 책을 사 가는 곳이 아니고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는' 서점을 연 것은 그녀가 책 자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녀가 <세렌북피티 책방>에 마련한 책을 읽을 수 있는 편의 시설(심지어 침대도 있다)은 대형서점에서 제공하는 독서 공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렌북피티 책방>은 책을 사고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책을 즐기는 곳이라고 해야 함이 마땅하다(그녀의 감각 넘치는 책 전시 방식이나 책을 고르는 안목이 마음껏 발휘된 책방에서 책을 사지 않고 나오긴 힘들기는 하다). <세렌북피티 책방>은 베스트셀러 코너라든가, 장르별로 분류된 매대 대신 '당신의 봄은 어느 쪽이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한쪽은 싱글족을 위한 책, 반대쪽은 커플이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을 전시하는 식이다.
서가의 문구는 주기적으로 변경되고 문구에 걸맞은 책의 목록은 김세나씨가 직접 정하고 전시한다. 서점 전체가 김세나씨의 정성과 감각으로 가득 찼다. 서점에 전시된 한 권 한 권의 책이 모두 '존재 이유'가 있으며 서점을 찾는 손님은 맥주를 마시고(<세렌북피티 책방>에서는 세계의 다양한 맥주도 판매한다), 차를 즐기며, 사진도 찍고, 담소를 나누면서 좋은 책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