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람들은 어떻게 타인과 관계를 맺고, 어떻게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삶의 기복에 대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자기 삶을 결정하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중국 철학자들의 생각은 2000년 전과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는 걸 하버드의 마이클 푸엣 교수는 강조한다. 이 책의 원제 <The Path>(2016)는 '좋은 삶을 이끄는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길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년에 <The Sunday Times>는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선정하고, 서양전통과 완전히 다른 동양철학의 놀라운 반전에 주목했다.

2000년 전 동양철학의 어떤 측면이 하버드의 지성들을 열광시키고 있는가?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으레 추상적이고 일상에서는 써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동양철학자들(즉,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은 삶을 바꾸는 충만한 삶은 다름 아닌 일상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서양철학은 형이상학적인 이성세계를 중시한 반면에, 동양철학은 일상적 삶이 당연히 따라야 할 도(道)의 문제에 집중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유학이나 도학의 전통에 따라 볼 때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불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맞지 않는 지적이다. 그만큼 저자는 동양철학의 일부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별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본다.

이런 문제의식을 깔고, 21세기 서양 지성이 동양철학의 일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동양의 입장에서 재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더 패스>는 2016년 늦가을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고, <The Sunday Times>에서는 이 책을 인문학 베스트셀러로 선정했다.
<더 패스>는 2016년 늦가을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고, 에서는 이 책을 인문학 베스트셀러로 선정했다. ⓒ 김영사
저자는 기원전 600년경 유라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철학․종교 운동에서, 이른바 '축'(軸)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기에 그리스에서 발전한 사상이 중국에서도 출현했고, 반대로 중국에서 발전한 사상이 그리스에서도 출현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하여 전통적 사상을 근대적 사상과 반대라고 여기는 것이 옳지 않듯 '중국식' 견해를 '서양식' 견해와 반대라고 여기는 것 역시 옳지 않다는 게다. 거시적 맥락에서 저자의 이런 견해에 일단 공감을 표하면서 그의 해석을 따라가 보자.

저자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세계를 어떻게 조직해야 할지에 대해 중국철학자들은 '평범한 일상'을 통해 그 길을 찾고자 했다는 게다. 하여 그는 이 책의 제목도 중국철학의 '도'(道)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도'는 우리가 실천하고자 하는 '이상'이 아니라, 선택이나 행동을 할 때 또는 관계를 유지할 때에 꾸준히 따라야 하는 통로나 길(path)을 의미한다. 하여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매 순간 '길'을 새롭게 개척한다는 게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중용> 1장에서 "도(道)라는 것은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저자는 그 길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철학자가 동의할 법한 통일된 하나의 길(즉, 道)은 없다. 그들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에 반하는 주장을 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개척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놀랄 정도로 서로 다른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를 바꾸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바꿀 무한한 잠재력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다.

여기서 저자는 그 길을 하나의 '방법'(way) 차원으로 이해한 나머지 <중용>에서 말하는 형이상의 '도'(道)를 간과한 면이 없지 않다.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개척하는 방법에 관해 서로 다른 길을 제시했다는 것은 '방법'으로서 삶의 길을 닦는 과정에 주목한 탓이다.

하지만 하늘의 지엄한 명령(天命)으로서 도의 길은 단 하나 일뿐이다. 그러나 저자가 "그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를 바꾸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바꿀 무한한 잠재력"을 강조한 점은 탁월하다. 하여 <중용>에서는 그 길을 닦는 과정이 곧 교육(修道之謂敎)이랬다.

저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 살면서(교통수단도 없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가 약 2500년 전 거의 동시에 비슷한 질문을 던진 것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가 유라시아 내부의 역동적 긴장 관계와 역사적 움직임을 상당부분 규정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사회촉매제가 되었다는 게다.

공자에 대해

기원전 500년경 유라시아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주요 철학의 밑바탕에는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와 철학 운동이 출현한 시기는 대개 사회적 위기가 만연한 때였다. 세상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며, 그런 세상을 바꿀 대안은 무엇인지 그들은 질문했다. 이런 질문을 통해 철학자들은 개인의 잠재력은 위대하다는 고무적인 인간관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공자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 가상 의식(儀式)에 주목했다. 저자는 공자의 철학은 나를 알고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상식을 온통 뒤집는 사상이라고 일축했다. <논어>에는 공자의 일상적 삶의 자세를 아주 사소하게 기술하고 있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
"식사 하실 때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처럼 <논어>는 공자의 언행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논어>가 왜 위대한 철학서인지를 이해하려면 공자가 식사 중에 어떻게 처신했는지를 배워야 한다. 삶의 일상적 순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공자는 모든 걸 이런 질문에서 시작했다.

저자는 '본성은 천명에서 나온다'는 '성자명출'(性自命出)을 인용하면서 그 가르침을 "기쁘고, 화나고, 애통하고, 슬픈 기운은 본성이다. 그것은 밖으로 드러나는데, 이유인즉 끄집어내지기 때문이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본래 <성자명출>(性自命出)의 가르침은 이렇다.

도라는 것은 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道始於情), 정이라는 것은 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情生於性). 도의 시작은 정에 가까운 것이다(始者近情). 그러나 학습을 거쳐 완성되는 종착지는 의에 가까운 것이다(終者近義).

도올 김용옥은 '길'(道)은 반드시 선택되어 반복적인 습성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랬다. 그러나 그 선택된 길은 계속 끊임없이 사람이 다니고 보수공사를 해야만 유지되는 거랬다. 그 길을 닦는 과정(즉, 修道)을 유학에서는 '근정'(近情)에서 '근의'(近義)로 가는 과정이랬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가도록 만드는 것은 '의'(義)이지만, 그것은 '정'(情)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나비가 꽃을 찾는 기질을 타고나듯 인간에게도 역시 기질이 있다. 인간의 기질은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데서 드러난다. 감정은 우리가 무엇과 맞닥뜨리느냐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매순간 우리는 무언가에 맞닥뜨리고, 무수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린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반응 방식을 다듬어 가고 작은 질서를 만들어 간다. <성자명출>은 우리가 가능한 한 즉각적인 감정에 따라 반응하는 상태에서 옳게(義) 반응하는, 즉 더 나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상태로 옮겨 가고자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여기 '의'(義)를 개발한다는 것은 심미적 감성을 계발하는 과정으로서의 수양 혹은 수도의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 공자는 관습과 의식으로서의 습성(習性)을 중시한다. 하여 공자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性相近), 살아가는 습성에 따라 서로 멀어지게 된다(習相遠)고 했다. 저자는 인간을 습관의 동물이라 했다. 내가 바뀌려면 평소 모습에서 탈피해 뭔가 다른 모습을 개발해야 한다. 하여 공자가 말하는 예(禮), 즉 의식이 변화를 이끌어 내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동안 잠시라도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공자의 예를 '가상 의식 세계'의 확장으로 해석한다.

공자는 제례를 말하면서 "우리는 마치 혼령이 오는 것처럼 제물을 바친다"고 했다. 제례는 산 사람들 사이의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죽은 자는 남은 자들의 관계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삶의 과정에서 의식(儀式)을 반복하다 보면 참가자에게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고, 실제 삶에서도 서로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게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평소에 공손한 표현을 쓰고 고맙다는 말을 하는 '가상 의식'(as-if rituals)을 중시한다.

우리는 의례적으로라도 사랑을 표현하고 칭찬하는 순간 두 사람은 정말로 사랑을 느끼고 더 친숙해진다. 공자는 일상적으로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하기를 좋아해서 앉을 자리도 반듯하게 매만졌다. 뿐만 아니라 함께 앉을 사람의 자리도 정돈해 주는 사소한 행동으로도 상대에게 깊은 인상을 주곤 했다. 우리는 저녁상을 차리는 의식만으로도 잠시 숨을 돌려 가족 간에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공자는 크고 극적인 게 아니라 반복되는 사소한 순간에 초점을 맞춘 변화를 중시한다. 우리가 '고마워' 혹은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다양한 가상 의식은 사람들을 수시로 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서서히 그러나 제법 극적으로 돈독해진다.

세상은 분열되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성자명출>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즉흥적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의로운 행동방식을 내면화하면서 조금씩 변신하게 된다. 우리는 늘 변한다. 가변적 자아에 맞춰 살아가는 동안 무한한 가능성이 드러나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삶을 실질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의식이 아닌 정형화된 행동과 습관이다. 이런 것은 말로 다른 사람들을 배려 할 때조차도 방해가 된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이런 정형화된 틀을 깨는 가상 의식을 실행한다면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감지하는 능력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인(仁), 즉 어진 감정 혹은 선한 감정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인'(仁)의 중요성을 제기한다. 그는 "인은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반응하는 능력이고,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행동하며 그들의 좋은 면을 이끌어내는 감정을 계발하는 것"이랬다.

공자는 인을 따로 정의하지 않고 수시로 변하는 일상적 상황에서 인을 느끼고 드러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그때 제자들이 이해해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우리는 누구나 인을 느낀다. 그리고 일단 인을 인식하게 되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공자에 의하면, 인을 연마하고 표현하는 것은 윤리적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공자는 자신을 설명해 달라는 제자의 말에 "열중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우면 근심도 잊고, 늙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그는 오직 일상에서 나를 끊임없이 수양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런 일상에서 시작하고, 그런 일상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 일상 속에 진정 위대한 세상의 변화가 숨 쉬고 있다는 게 공자의 가르침이다.

맹자에 대해

 <더 패스>
<더 패스> ⓒ 김영사
이어 저자는 변덕스러운 세상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에 대한 맹자의 가르침에 주목한다. 맹자는 세상은 분열되고 무질서하기에 안정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만 인간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살아갈 수 있다는 게다.

맹자는 우리가 상황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기 위한 어떤 잠재력을 타고 났다고 믿었다. 그것은 선(善) 즉, 인을 실천할 잠재력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선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 흐르지 않는 물이 없다"고 했다. 저자는 맹자에 기대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을 싹 틔우고 재배할 조건을 한 단계씩 배워나갈 수 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들에서 싹을 틔우는 한 농부로 시작하겠지만, 그 결과는 주변으로 점점 퍼져나간다. 우리가 선을 베푼 사람들이 이번에는 자기들도 더 나은 행동을 하고 자신의 인을 싹 틔운다. 이런 인의 순간이 차츰 쌓여 하루를 채우고, 결국은 삶 전체를 가득 채운다.

머리와 가슴은 똑 같이 마음(心)에 연관된다. 즉, 우리의 마음은 합리성의 중심일 뿐 아니라 감정의 근원이다. 따라서 머리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면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게다.

신영복 교수는 우리에게 가장 먼 거리의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했다. 맹자는 "머리를 써서 감정을 수양하라. 무엇이 내 감정과 반응을 촉발하는지 날마다 주시하라"고 가르쳤다. 그에게 마음수양은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더 깊이 관여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와 주변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하여 맹자에게 마음수양은 곧 복잡한 맥락에서 '유연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과 연관된다. 그에게 마음을 닦는다는 건 판단력을 갈고닦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계획할 수는 없지만, 더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만들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맹자는 삶의 세계는 하늘의 명(命)이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수갑을 차고 죽는 건 올바른 명이 아니다". 하지만 "명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 밑에 서질 않는다. 자기 도(道)를 다하고 죽는 게 올바른 명이다."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세계로 보이기 시작한다. 필자가 보기에 여기 맹자는 공자의 연장선에서 논의될 뿐,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나 군자에게 요구되는 고결하고 담대한 '지'(志)의 세계가 빠져 있어 아쉽다.

노자에 대해

태풍에 큰 참나무는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지만 어린 나무는 바로 그 약함 덕분에 살아나 번식한다. 노자(老子)에 의하면 어린 나무가 살아남는 이유는 그것이 '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노자에게 '도'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원이며, 말로 형언할 수 없고 분별이 없는 상태다. 노자는 영적 깨우침과 일상이 연관되는 것임에도 우리가 그것을 분리함으로써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노자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인과 의, 즉 어짊과 옳음까지도 곧바로 구분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구분 없이 연관되는 상태인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란다. 노자는 변화를 적극 지지하지만, 그 변화를 실천하는 방법론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노자는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입장이다. 하여 노자에게는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막강한 사람이다. 저자는 덫으로 나폴레옹을 시베리아 내륙 깊숙이 유인한 러시아 장군들을 보라고 말한다.

진정한 영향력은 눈에 띄는 힘이나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이것이 노자식의 현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노자가 말하는 지도자는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해도 백성들은 하나같이 '저절로 그리되었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한 힘과 영향력은 직접적 행동이나 눈에 띄는 전략에서 나온다기보다 극적으로 다른 현실이 조성될 토대를 다지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나중에는 세계를 바꿀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된다. 이를 실천한 역사적 인물로 저자는 링컨, 루즈벨트, 레이건 등 세 사람의 대통령을 들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반은 수긍이 가지만 반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자에 이어 저자는 기원전 4세기 중국의 '내업'(內業)을 말한다. 여기서 그는 모든 인간이 내면적으로 갖추고 있는 신성(神性)에 주목한다. 인간은 자기 수양을 통해 신성을 얻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꿔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활기를 느끼게 하기 위해 '심호흡'을 권장한다. 우리는 숨쉬기로 자신을 달래고, 부정적 감정을 다스리고 마음을 편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기운을 들이마신다.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또 하나의 예는 적절한 운동이다. 몸 운동을 통해 뇌에서 분비되는 '엔드로핀'을 '내업'에서는 내 안에 흐르는 정기 또는 혼이라 했다.

'내업'에 따르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모두 기(氣)에서 나온다. 이 '기' 가운데 가장 신묘한 기운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활기를 주는 '신성한 기운'이다. 동학에서도 인간을 "안으로는 신령하고, 밖으로는 모든 기운과 통하는"(內有神靈, 外有氣化) 그런 존재로 규정했다.

'기'(氣)는 모든 것에 존재하지만 무생물은 저차원의 거친 '탁기'(濁氣)로 구성되고, 고차원의 정제된 생명에는 '정기'(精氣)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그 기가 가장 신묘하고 정제된 수준에 이르면 '신기'(神氣)가 된다. 우리 인간은 아래에 있는 땅의 탁기와 위에 있는 하늘의 신기가 합쳐진 존재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 삼위가 일체다.

인간은 나이가 듦에 따라 기가 점점 빠져나가 탁기만 남을 수도 있고, 혼을 잘 갈무리해서 신의 경지에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 그 '기'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하여 '내업'에서는 자기 수양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권고한다.

우리가 나이 들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을 키운다면 점점 도에 가까워지고 활력을 느끼게 된다. 내면의 안정을 유지할수록 좋은 기를 품을 활력이 향상된다. 몸과 맘은 모두 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몸을 단련하면 마음을 단련하는 데도 좋고, 마음을 안정되게 하면 몸을 편하게 하는 데에도 좋다.

하여 '내업'에서는 바른 자세로 몸을 곧게 펴고 서서 기가 원활히 순환하게 하라. 규칙적으로 심호흡을 해 평온한 호흡으로 가슴을 채워라.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되 절제해서 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라는 식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분노를 그치는 데에 시만 한 게 없고, 근심을 없애는 데 음악만 한 게 없다"고 했다. 즉, 음악과 시를 통해 기를 수양하라는 게다.

하지만 철학자 장자(莊子)는 인간을 신격화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런 인간의 영역을 아예 뛰어 넘으라고 가르친다. 예전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며 마음껏 즐기는 동안 자신이 장자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보니 자기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자는 유명한 나비 이야기로 세상을 바라보는 평범한 시각을 깨고자 했다.

장자에게 세상을 즉흥적으로 만끽한다는 것은 그 즐거움에 넋을 잃은 상태로 '몰입'할 때 얻는 느낌이다. 장자가 말하는 '도'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화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장자는 '음'과 '양'을 말하면서, 겨울에는 차갑고 어두운 기운인 음이 득세하다가, 차츰 덥고 밝은 양의 기운이 득세하면서 여름이 온다고 했다.

음양의 모든 기운이 끝없이 필연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변하는 것은 계절만이 아니다. 우주의 모든 변화가 음양의 작용에서 생겨난다. 이런 음양론에 착안하여 국문학자 조동일은 인류 문명사의 흐름을 '생극론'(生克論; becoming-overcoming)으로 일반화했다.

장자는 우주를 통틀어 저절로 도를 따르지 않는 단 하나! 바로 우리 인간을 말했다. 우리 인간만 저절로 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게다. 장자에는 포정이라는 백정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정의 일과는 칼을 쥐고 소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경력이 쌓이고 요령이 생기자 포정은 어떤 소든, 어느 부위든 보편적 유형의 흐름을 찾아낸다. 그는 춤을 추듯 완벽한 리듬으로 고기를 자르고 뼈를 골라낸다. 포정은 의식적으로 신경 쓰기보다 혼을 쏟을 때 도를 감지했다.

이로써 그는 일상을 채운 신들린 칼질에서 만족감과 즉흥성을 찾아냈다. 통치자는 포정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훌륭하구나! 그에게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웠노라"면서 감탄했다. 이런 삶은 잘 훈련된 즉흥성 때문이다.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의 대자유는 이런 경지다.

장자는 우리의 상상력과 창조력은 지속적인 즉흥적 몰입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 진정한 상상력과 창조력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답하는 핵심이다. 세계 전체를 열린 공간으로 체험할 때 모든 순간이 창조적이고 즉흥적이 된다. 우리의 의도된 경험을 초월해 상상하는 능력을 꾸준히 키운다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게다.

장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삶을 새롭게, 열정적으로 경험하려면 모든 것을 다르게 보는 원칙으로서 '관점 이동'을 해야 한다. 장자는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삶을 끌어안는 사람을 말한다.

마음을 열고 삶을 끌어안는 사람에게 다림질도 지겨운 집안일이 아닌 훈련된 즉흥성을 키우는 연습으로 볼 수 있고, 코감기를 불편한 것이 아닌 이불속에서 소설을 읽는 기회로 볼 수 있으며, 파혼을 상심이 아닌 새로운 미래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그저 모든 현상은 흐름과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장자에게는 죽음도 도의 끝없는 순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으로 살던 나는 죽는 순간, 더 큰 자연의 일부가 된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우주의 흐름과 변화의 일부이며,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이기에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열린 태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주 전체를 조망하고 세상의 끝없는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이 장자가 제안하는 무제한적 관점과 훈련된 즉흥성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은 바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우리가 지구상의 어떤 존재보다 우주를 더 넓게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방대한 상상력 덕분이다. 오로지 우리 인간만이 끝없는 가상 세계로 들어가 다른 존재의 시각으로 우주를 대면할 수 있다. 이것이 도에 따라 변화의 흐름을 타는 삶이다. 이른바 큰 자유 속에서 소요하는 삶이다.

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가능성의 시대'를 말한다. 예수회는 16세기에 중국으로 길을 떠났다. 거기서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이들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관료제는 귀족이 아닌 교육받은 지식층이 이끌었고, 법률은 농민이든 귀족이든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었으며, 사람들은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교육을 받았고, 능력을 중요시해 사회이동이 가능했다. 이 모두가 유럽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이 기록은 2세기가 지나 유럽 전역을 휩쓴 계몽주의의 불씨가 되었다. 저자는 유럽이 물려받은 것 중 상당부분이, 나아가 21세기 세계도 고대 중국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특히 법가 사상은 유럽에서 근대적 합리성에 바탕 한 국가가 출현하는 데에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도덕적 수양, 자애로운 인(仁) 사상이나 무위자연 사상은 서양에서 간과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언급한 여러 사상의 갈래 중에서 일상의 세계와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실용성에 주목한다. 이런 사상적 맥락에서 저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꿀 최선의 방법을 묻는다. 서양의 지식인다운 해석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분열되어 있다면 그만큼 새로운 질서를 만들 기회도 많은 법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우리 손에 달렸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근데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강조하는 일상 세계와 삶에 뿌리를 둔 '실용성'은 그게 실용적 유효성 때문이 아니라, '원초적 가치'이기 때문에 중요한 게다. 우리가 흔히 <중용>을 '성'(誠)의 철학이라는데, 성심(誠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원초적 가치이지 실용적 수단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 동양철학의 지혜에 의존하여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가는 길을 모색한다. 동서양의 지혜가 소통되고 만나는 지점에 희망의 21세기가 자리할 게다. 세상을 바라보는 혁신적 생각은 진적에 동양철학에서 담론화 되어 왔다. 인류역사에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덧붙이는 글 | <서평> Michael Puett, Christine Gross-Lob. The Path (2016, 이창신 옮김,김영사)



THE PATH 더 패스 : 세상을 바라보는 혁신적 생각 - 하버드의 미래 지성을 사로잡은 동양철학의 위대한 가르침

마이클 푸엣.크리스틴 그로스 로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2016)


#길, 도#THE PATH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