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다운 봄이 왔다. 이제는 봄을 한껏 실감해도 미안하지 않을 것 같다. 1075일 만에 저 깊은 바다에서 올라온 세월호와 마침내 박근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이제 정말 봄을 마음껏 느껴도 될 것 같다.
봄이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은 아니지만, 봄은 오기 시작하면 기어이 온다. 부드럽게 아이의 걸음으로 오는 봄을 막을 장사도 없고, 우리 곁에 왔는가 싶을 때 쏜살같이 달아나는 봄을 잡을 이도 없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산수유와 흔하지 않는 할미꽃을 한 날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구례 산수유 마을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는 소식과 동강 바위 틈에 동강할미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마음만 그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꿩 대신 닭이라고 서울 하늘에서 별처럼 터지는 산수유와 동강할미의 사촌격인 할미꽃을 만나니 '닭'도 그런대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닭', 그래 아무튼 오늘은 봄날치고는 쌀쌀하니 저녘엔 '닭'이라도 한 마리 푹 과서 상에 올리고 닭이나 씹어야겠다.
진달래 피어난 가지에 직박구리 앉고, 이런저런 까닭으로 담지는 못했지만, 홈매화의 꽃비도 내렸고, 매화나무에 찾아온 동박새까지 만났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와 자기가 상상하는 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준비해야 할 세세한 것들이 조금은 귀찮아졌다. 이제는 꼭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마음에 담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더 좋아서가 아니라 이젠 조금은 열정대로만 몸이 움직여 주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봄의 색깔이 이렇게 다양할까 싶다. 백목련도 그냥 '백'만 있는 것이 아니요, 매화도 '청매'가 있는가 하면, 가지가 능수버들처럼 축축 처진 능수매화도 있다.
갓 피어난 봄꽃은 참으로 귀엽다. 다 피어나지 않아서 예쁜, 다 피어난 것이 가지지 못한 '갓' 혹은 '어린'이라는 것을 소유한 것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본다.
꽃들은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기다려주며 피어나는 것이리라. 먼저 피어난 꽃이 '어서 피어나라!'고 응원하고, 나중에 피어난 꽃들은 '이제 곧 피어날 터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화답하고, 마침내 현실이 되어 조우하는 것이 그들이 세상이 아닐까?
산수유와 매화, 진달래와 산수유. 그렇게 서로 다른 그들은 그 다름으로 차별을 만들지 않고 어우러져 하나의 봄을 그린다.
이렇게 피어나는 봄꽃을 만난 날, 영춘화의 꽃무덤을 본다. 올해 보지는 못했지만 붉은 동백도 그렇게 꽃무덤을 만들며 내년을 기약했을 것이다. 붉은 동백의 꽃무덤만 생각했는데, 노란 영춘화의 꽃무덤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그랬다. 붉은 동백만 꽃무덤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들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춘화의 꽃무덤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화사하진 않아도 목련도 그리할 것이며, 피어나는 꽃들은 모두 그렇게 낙화함으로 또 다른 여정을 향해갈 것이다.
봄을 시샘하는 날씨였지만, 진짜 봄을 비로소 만났고, 비로소 봄맛을 느낀 하루였다. 어떤 겨울도 봄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소개된 꽃들은 송파구(오금공원)와 강남구(봉은사)에서 3월 27일 담은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