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찾은 일본인들 마쓰다 노부히로(46) 씨와 한국어 교실 '무지개' 수강생들은 소녀상 옆에서 천막 농성을 하는 청년들을 응원하고, 진상규명과 연대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찾은 일본인들마쓰다 노부히로(46) 씨와 한국어 교실 '무지개' 수강생들은 소녀상 옆에서 천막 농성을 하는 청년들을 응원하고, 진상규명과 연대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 지민섭

일본인들이 소녀상을 찾았다. 평범한 소도시 주민들이다. 마쓰다 선생과 풀뿌리 한글학교 '무지개'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무지개'는 일본의 소도시 나라(奈良)현 미야케(三宅)초에서 과거사를 비롯한 한∙일관계와 한글을 공부하고 있는 시민모임이다.

이번 방문은 '무지개' 한글학교의 한국역사문화 답사기행이다. 개교해 1년 반이 지나면서 '한국 답사를 하고 싶다'는 학생들의 희망으로 계획되었다. 모임을 이끄는 현직 초교 교사 마쓰다 노부히로(46)씨는 3월 25일부터 2박 3일간, 8명의 수강생과 함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서대문 역사박물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을 방문했다.

피차별 부락민 교육에서부터 한∙일 역사 교육까지

'무지개'의 출발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라현 미야케초에서 문해교실이 개교했다. 일본의 피차별 부락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풀뿌리 주민 교실이었다. 학교에서 글을 못 배운 피차별 부락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일본 글을 배웠다.

1995년, 그 교실에서 일본 글을 배운 어떤 아주머니가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자기 딸이 재일조선인과 결혼한 것이 계기였다. 1996년 근처 학교로 부임한 마쓰다씨가 그녀를 만났다. 마쓰다씨는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신 2006년까지, 10년 동안 함께 한국어와 재일조선인 문제를 공부했다"고 전했다.

2007년부터 그 교실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모집해, 한국어와 인권문제를 공부했다. 10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2013년 사업이 종료되어 교실은 없어졌다. 이후 몇몇 사람들이 다시 한국어와 한∙일관계, 역사, 인권문제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2015년 여름, 전 나라현 의회 의원 야마시타 쓰토무(전 부락해방동맹 위원장) 사무소에서 한국어 교실 '무지개'가 시작됐다. 한∙일 양국을 맺는 무지개가 되자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학생은 8명으로 한국어와 한∙일관계, 역사문제 등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공부하고 있다. 자영업자, 경비원, 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한국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

25일 오후 1시, 김포공항에 도착한 마쓰다씨와 무지개 학생들을 만났다. 한국 방문 목적을 묻자 간사이(關西) 지방의 억양이 강한 일본어와, 서툴지만 정확한 한국어가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NPO 나라 인권 센터'에서 활동 중인 니시하라 마나부(64)씨는, "일본 뉴스에서 위안부 밀실 합의 등을 보도하긴 하지만, 자세한 내막이나 한국에서의 반대 관점을 보도하지 않는다"며, "한국에서는 어떤 의견이 나오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마도코로 유카(52)씨는, 긴 대화도 편하게 이어갈 정도로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녀는 "한국의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이번 기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했다. 각자 한∙일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달랐지만 '역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말은 한결같았다. 마쓰다 씨는 "이번 방문을 통해 학생들이 역사를 더욱 가깝게 느껴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뜨거울 때 꽃이 핀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은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이었다. 학생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허리를 굽혀 소녀상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들은 소녀상 옆에서 천막 농성 중인 청년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해 질 녘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씨에 청년들을 먼저 걱정하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소녀상을 지키던 이성철(25)씨는 "일본 사람들이 와주는 게 힘이 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미안해한다. 일본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또, "그들이 찾아오는 이유가 우리가 농성하는 이유와 아주 가깝다. 한국인은 우리를 응원하러 온다면, 일본인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오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싸운다는 느낌이 든다. 농성의 근본적 이유를 다시 일깨워주신다"고도 했다.

마도코로씨가 "젊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활동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최혜경(대학생 운동행동대표, 23)씨는 "소녀상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안부 합의에는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있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구문이 있다. 부산 소녀상 철거 얘기가 나오면서, 서울 소녀상까지 위험해졌다. 나이에 상관없이, 역사는 지켜야 하는 거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마쓰다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소녀상 밑에 새겨진 피해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故 김학순 할머니를 소개하며, "1992년 나라 교대에 다닐 때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경험을 전했다. 재작년에는 통영의 피해자 할머니를 만났다. 몸이 좋지 않아 누워 있던 할머니가 "당신들이 와도 소용없다"고 하는 것을 듣고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단어를 신중히 고르려는 듯, 중간중간 말을 멈추며 당시를 회상했다. 학생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소녀상과 그 밑의 이름패를 바라봤다. 소녀상 옆에는 방문자들이 놓고 간 꽃과, '뜨거울 때 꽃이 핀다'고 적힌 이효열 작가의 팻말이 있었다. 설명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가만히 서서 그곳을 응시했다.

청년들이 마지막 인사로 "먼 곳에서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항상 기억하겠다"고 했다. 마쓰다씨도 "나라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며, 다짐을 주고받았다. 한국 청년들은 소녀상 배지를 하나씩 나눠줬다. 수강생들은 '한∙일합의 폐기! 소녀상 철거 반대'라는 구호가 쓰인 상자에 기부하고, 서명지에 이름을 적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 그들의 옷과 가방에는 소녀상을 지키는 소녀가 그려진 배지가 꽂혀 있었다.

소녀상 배지를 모자에 단 니시하라 마나부(64) 씨 25일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방문한 일본인 한국어 교실 '무지개' 학생들이 자신의 옷과 가방에 소녀상을 지키는 소녀가 그려진 배지를 달고 있다.
소녀상 배지를 모자에 단 니시하라 마나부(64) 씨25일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방문한 일본인 한국어 교실 '무지개' 학생들이 자신의 옷과 가방에 소녀상을 지키는 소녀가 그려진 배지를 달고 있다. ⓒ 지민섭

타츠미 미츠오(70)씨는 "일본 정부는 소녀상을 없애려고 하지만, 역사로 남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소녀상 지킴이의 열정이 사회 전체로 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마도코로씨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에 온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역사 공부를 통해 한‧일관계가 개선된다면 참혹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니시하라씨는 "뉴스에서만 보던 소녀상을 처음 봤다"며, "그곳을 지키는 청년들의 진실한 마음이 전해졌다"고 말했다.

마쓰다씨도 의견을 보탰다. 먼저 "일본군 사단의 '영외시설규칙'과 육군 중앙의 '야전 주보 규칙'을 위안소 관련 자료로 인정하여,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내용을 '일본군 간여하에'가 아닌 '일본군 주도하에' 위안소가 운영됐다고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일본의 진상규명 시민단체는 일본 야당에 국회에서 이를 질문하도록 요청했지만, 이들은 힘이 너무 약해 못하고 있다"며, "2015년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일본 정부에 이런 자료를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할 것'을 요청했는데, 박 전 대통령은 무시했다"고 했다.

"2015년 밀실 합의 뉴스를 보며, 피해자들에게 공감하지 못한, 당사자들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느꼈다"는 그는 "일본 정부가 역사적 사실을 빨리 인정해서, 기부하듯 10억 엔을 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문제에 대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생존자들께서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그분들, 그리고 지원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소녀상 방문 날엔 광화문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촛불집회가 있었다. 소녀상 앞에서도 집회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마쓰다씨와 학생들은 집회에도 관심을 보이며 그들이 외치는 구호의 의미를 물었다. "한국의 에너지가 느껴진다"며 큰 집회가 지속해서 열리는 것을 부러워했다. 세월호 리본의 의미를 묻기도 하고, 세월호 미수습자를 추모하는 부스에서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명복을 빌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만나다

그들은 소녀상 외 다른 장소들에도 큰 관심을 보이며 방문의 의미를 되새겼다. 일정 내내 만원 지하철을 통해 이동하고, 먼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26일 오전에 갔던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많은 학생이 한숨을 뱉었다. 고문 장면을 재현한 모형이나, 감옥 방을 구경할 때는 가끔 "무섭다"는 말이 나올 뿐, 긴 침묵이 이어졌다.

특히 많은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던 곳은 독립운동가들의 수형 기록표 사진으로 가득한 방이다. 5000명 가량 되는 수감자들의 사진으로 벽면이 가득했다. "많이 추우셨죠. 많이 아프셨죠. 이제 나오세요. 대한민국이 당신을 문밖에서 기다립니다"라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사진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한 채 수감자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니시하라씨는 "고통받으며 독립을 열망했을 당사자와 사람 대 사람으로 대면하는 곳이었다"며,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마도코로씨는 "너무 죄송하다"고 거듭 말하며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눈물이 맺혔다"고 했다.

"역사 공부를 통해 배운 내용인데도 이렇게 와 보니 다르구나. 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도 있구나"라고 하며 "역시 일본인들은 아직 한참 더 알아야 한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오사카베 미치코(66)씨는 작년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경험을 떠올렸다. "똑같은 인상을 받았지만, 이곳이 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일본이 가해자이기 때문에 더"라고 전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수형 기록표 보는 니시하라 씨 26일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찾은 니시하라 씨는 “고통받으며 독립을 열망했을 당사자와 사람 대 사람으로 대면하는 곳이었다”며,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수형 기록표 보는 니시하라 씨26일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찾은 니시하라 씨는 “고통받으며 독립을 열망했을 당사자와 사람 대 사람으로 대면하는 곳이었다”며,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 정준기

안중근 기념관도 인상 깊었던 방문지로 꼽았다. 테라다 슌이치(63)씨는 일본에 돌아가면 안중근 의사에 대한 책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쓴 '대한독립'이라는 문구 앞에서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오랜 시간 머물렀다. 손가락을 잘라 맹세한 것에 충격받은 듯 "글씨를 피로 적은 게 맞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일본 초대 총리 이토를 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

2014년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개관한 다음 날,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한 말이다. 마쓰다씨는 그 일화를 이야기하며, "일본 역사 교과서는 '안중근'에 대한 언급 없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게 사살당했다'고만 진술하기 때문에, 평소 일본인들은 안중근의 이름조차 잘 모른다"고 설명했다. 관방장관의 '유감' 발언이 논란이 되자, 그제야 대중들에게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존재가 알려진 수준이다.

기념관에서 마쓰다씨의 경험담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6학년을 맡았던 그는 안중근 의사 분장을 하고 '동양평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선생님 한국 사람입니까? 왜 그런 수업을 하십니까?"라며 관방장관의 발언에 동조하는 학부모의 항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일본 사람 중 많은 이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한다. 마쓰다씨는 일본 대중이 식민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정부의 태도가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한국 운동가들과 동질감 느껴

예정된 일정 외에도 기억할 장면들이 많았다. 첫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평화시장 앞 전태일 열사 흉상이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열사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평화시장을 지나며, 그들은 7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과 교감하는 듯했다.

마쓰다씨는 "모두 나라현에서 인권 운동을 해오던 분이니까, 한국에서도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며, "소녀상 지킴이 분들에게도, 전태일 열사에게도, 세월호 집회 참가자들에게도" 그렇다고 말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그들은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성 평등, 세계적 우경화, 빈부 격차, 등 인권에 관련된 다양한 생각들을 들려줬다.

둘째 날 안중근 기념관을 둘러본 뒤, 남대문 시장 앞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작별을 아쉬워하며 나라현으로 놀러 오라는 그들은, 귀국한 뒤에도 묵묵히 공부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테라다 히로미(63)씨는 "많이 배웠다. 소녀상 앞에서 만난 젊은이들을 본받아 나도 뭔가 해야겠다고 다짐했다"며 한국에 또 오겠다고 말했다.

마도코로씨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 아팠다. 일본 사람으로서 미안하고,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마쓰다씨는 "소녀상 앞을 지키던 한국 청년들은 일본 사람이 와주는 게 의미가 크고, 도움이 많이 된다 했다. 일본에서 굳이 거기까지 찾아가는 사람들은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고, 다양한 차별 문제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거기 있는 분들과 마음이 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한∙일관계를 우호와 평화의 관계로 만들고, 재일한국인 차별을 없애기 위해 더욱 교류가 활발해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일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후대에 그것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 기사] "일본교사도 한일합방 몰라...갈등 끝나지 않아"

덧붙이는 글 | 사진 촬영
ⓒ지민섭 jiminsub12@naver.com
ⓒ정준기 junjung35@hanmail.net



#소녀상#평화의소녀상#한일위안부합의#한일교류#안중근의사기념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