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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선감학원 소년들은 이 물지게를 지고 하루에 몇차례씩 약수터에서 물을 길었다.(선감역사 박물관)
선감학원 소년들은 이 물지게를 지고 하루에 몇차례씩 약수터에서 물을 길었다.(선감역사 박물관) ⓒ 이민선

'목숨 걸고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을 탈출하니 '삼청교육대'가!'

극적인 인생 아닌가?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비극 중의 비극이 될 만한 이야기다. 놀랍게도 실화다. 한일영(59세)씨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낙인이었다. 이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도착하셨나요?"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시곗바늘은 오후 2시 15분(3월 30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중 나온다고 하더니, 일찌감치 나와서 나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그러나 표정에는 그늘이 깔렸다. '고단한 삶'이 읽히는 짙은 그늘이었다. '새벽 댓바람에 일어나 청소를 하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그는 "국가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가끔 '어이구!'하는 한숨이 흘러나왔고 목에 메어 이야기가 끊어지기도 했다. 내가 그의 말을 끊어주기도 했는데,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할 때다. 예순이 다 된 남자가 우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거짓말을 했더라면 끌려가지 않았을지도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피해자 한일영 씨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피해자 한일영 씨 ⓒ 이민선

남들보다 1년이나 늦은 9살이 되어 들어간 학교마저 그는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술에 찌들어 사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한 뒤로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매질을 했는데 그런 아버지로부터 일영씨와 그의 누나, 그리고 여동생을 지켜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삼촌을 비롯한 친척들이 그들 남매를 거둬주기는 했지만, 밥을 먹이거나 용돈을 주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삼촌 집에서 며칠 머물면 그의 아버지가 득달같이 달려와 '내 아이'라며 데려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객지에서 자리를 잡은 어머니가 그들 남매를 거뒀다. 덕분에 가평 초등학교로 전학해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만두다시피 한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업에 흥미를 붙일 수는 없었다. 기초가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그는 삼촌 집에 다녀가기 위해 서울 삼선교행(성북구)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엄마도 허락한 방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걷고 있을 때 경찰이 느닷없이 소년 한일영의 허리춤을 움켜잡았다. 이것이 비극의 서막인 줄을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경찰은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그는 곧이곧대로 '가평'이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어디 가는 중?'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삼촌 집에 간다'고 대답했다. 경찰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일단 파출소로 가자'고 하고는 강제로 끌고 갔다.

"아마 옷차림이 남루하고 집 주소(가평)도 모르니까 고아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린애가 그 먼 가평에서 서울까지 혼자 왔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 같고요. 차라리 '삼선교'에 산다고 거짓말했으면 끌려가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참 어이없게도 경찰이라는 사람이 어린애 정강이를 군홧발로 마구 걷어차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그가 경찰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곳은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아동보호소였다. 첫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먼저 들어온 나이 많은 아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신고식이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13살 소년이 견디기 힘든 폭력이 계속됐다.

발로 가슴팍을 차고, 따귀 때리고, 원산폭격(땅에 머리 박기) 상태에서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은 비교적 가벼운 폭력이었다. 잠을 안 재우는 고문도 견딜만했다. 그보다는 곡괭이 자루 세례가 훨씬 더 무서웠다. 맞을 때도 고통스럽지만,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다른 사람이 맞는 것을 지켜볼 때 느끼는 공포를 견디기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집에 보내 달라는 말은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그 자체가 매를 버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늘 두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여야 할 정도로 철저히 통제돼 있어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다. 서로 감시하게 한 것이다.

그래도 자유를 찾아 도망치는 아이가 간혹 있었다.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붙잡히면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곡괭이 자루 세례를 받아야 했다. 공포에 질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년 한일영은 탈출할 생각을 접었다.

집에 보내준다고 해서 손들었더니, 지옥의 수용소로

 선감학원에서 죽은 소년들이 묻힌 배꼽산, 그 옆 비닐하우스가 예전에 소년들이 일하던 뽕나무밭이다.
선감학원에서 죽은 소년들이 묻힌 배꼽산, 그 옆 비닐하우스가 예전에 소년들이 일하던 뽕나무밭이다. ⓒ 이민선

"고향 배차 있다. 경기도에 집이나 친척 집이 있는 사람 손 들어!"

이 말을 듣고 소년 한일영은 기쁨에 들떠 손을 번쩍 들었다. 14살 되던 해 봄, 소년보호소에 온 지 8개월여가 흐른 뒤에 찾아온 기쁨이었다. 이렇게 해서 소년 한일영은 동고동락하던 또래 20여 명과 함께 소년 보호소를 떠나 '선감학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기쁨에 들떠 있는 그를 기다리는 것은 어머니가 있는 집이 아니라 엄청난 폭력이었다.

"선생들이 몇 마디하고 들어가니까 그때부터 잡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장(막사의 장) 반장 같은 저보다 몇 살 많은 아이들이 그런 거죠. 엎드려 뻗치라고 하고는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차고, 아프다고 하면 몸을 깔아뭉갠 채 얼굴 같은 데를 미친 듯이 마구 갈기고. 그날 밤, 얼굴이 퉁퉁 붓고 피범벅이 된 채로 씻지도 못한 채 방에 들어가 누웠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잠도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도 희망이 있어 견딜 만했다.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소년 한일영은 이때까지도 선감학원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거쳐 가는 곳인 줄로만 알았다. 3일 뒤에야 집에 절대 보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도망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그래도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과 반겨줄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 이야기를 하면 분명 집에 보내 주리라는 희망을 안고 선생님 방문을 두드렸다.

"이00 선생이었는데, 정말 제가 순진했던 거죠. 고아, 부랑아가 아니라고 하면서 분명 고향 배차라고 했으니 집에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나가 보라는 거예요. 며칠 뒤 사장이 저를 숙소 뒤 으슥한 곳으로 불렀어요. '왜 선생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면서 곡괭이 자루로 무진장 두들겨 패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었어요. '죽으면 이 고통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선생이 사장한테 그런 말 안 나오게 입단속 시키라고 한 것이죠. 그 뒤로는 집에 보내 달라는 말을 입 밖에도 못 냈어요."

선감학원 생활은 지옥이었다. 강제 노동과 배고픔, 그리고 엄청난 폭력이 소년 한일영을 괴롭혔다. 소년들이 한 일은 보리밟기와 보리 베기, 뽕잎 따기, 퇴비 만들기 등 참으로 다양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매타작을 한 뒤 밥을 굶겼으니, 무척 잔인한 방법으로 일을 시킨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 약수터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는데, 그때마다 어깨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소년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준 것은 산에서 얻을 수 있는 야생풀이나 나무 열매, 개구리, 뱀 같은 것들이다. 먹을 만한 것은 다 먹은 것인데, 그중에서도 뱀은 특식으로 꼽을 만큼 인기 있는 먹을거리였다. 그나마 물뱀 같은 흔한 것은 소년들 차지가 됐지만, 살모사 같은 귀한 뱀은 사장한테 받쳐야 했다. 그 뱀을 사장은 선생이나 원장한테 받치기도 했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는 별미 중의 별미지만 소년들한테는 금단의 열매와 같았다. 이 또한 사장한테 받쳐야 했다. 따먹다가 들키면 어김없이 매타작이 날아왔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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