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빽(백) 들고 다닐 일 있냐?"지난 2월 중순. 설날 2주 전이라 가기가 쉽지 않은 친정 엄마 생신에 모처럼 갔더니 엄마가 뜬금없이 이렇게 묻더군요. 값나가는 것이어도 내 취향이 아니라 결코 쓰지 않을 구슬백. 그런데 엄마의 말과 표정에서 내게 주시고픈 마음이 느껴져 "주시면 들지요",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엄마만의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는 장에서 보자기에 싼 것을 꺼내시더군요. 보자기를 풀어 보여준 것은 세월에 낡은, 누구도 들지 않을 그런 핸드백이었습니다. 구슬이라고 할 수 없는, 팥 알 크기의 납작한 알갱이들이 이어 붙여져 있는 가방이었습니다.
"…, 그런데 막상 들 일이 얼마나 있었겠나. 공연히 샀나? 고기를 사서 자식들 먹였으면 윤기가 흐르고 여름이 덜 더울 것인데 싶어 후회되고 죄스럽더라. 먹고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아버지 보기 부끄럽고…."1980년대 초 당시 꽤나 유명했으며, 누구가 쉽게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부담 없는 가방은 결코 아니었던 E메이커 그 가방을 가난한 농부의 아내인 엄마가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더니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 있었던 구슬백 사연을 들려주시더군요.
엄마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엄마와, 흔히 말하는 '여성들의 가방과 구두에 대한 로망', 그런 것과 연결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당시 아줌마들 사이에 인기 있었다는 가방 하나 아버지 몰래 질러 놓고 전전긍긍해 하고, 죄스러워하기까지 했던 엄마 모습이, 오래 전의 일인데도 건넌방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실까 쉬쉬 이야기하시던 팔순의 친정엄마 모습이 애잔하게 자꾸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 우리 네 자매가 엄마 모시고 2박 3일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와 많은 시간들을 보내며 엄마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가족 이야기든, 엄마만의 이야기든, 들어주고 기록하면 좋겠다고. 된장이나 간장 등을 담글 때 달려가 배우면서 만드는 방법이나 엄마만의 노하우를 기록해두는 것도 좋겠다. 아니 꼭 필요하겠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엄마와 함께 영영 묻히고 말겠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고.
오래전부터 엄마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 살에도, 마흔 살에도 엄마의 삶이 궁금했다. 그때는 써야 할 이야기들이 넘쳤으므로, 엄마는 자꾸 밀렸다. 언제나 내 뒤에 서 계실 거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곧 돌아와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한번 미루니 두서너 해가 휙휙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장편 작가가 되었고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며 문장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옮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무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8쪽)
그러나 먹고사는 일을 늘 앞세워야만 하는 처지로 쉽지 않더군요. 엄마와 함께 엄마의 많은 세월이 녹아 있는 진해 곳곳을 엄마와 함께 걸으며 나누고 느낀 것들이 바탕인 김탁환의 에세이 <엄마의 골목>(난다 펴냄)은 그래서 부러움과 아쉬움을 더해 읽은 책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고향이자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살아온 진해 곳곳을 엄마와 함께 걸으며 만나는 엄마의 진해와, 자신의 진해를 들려줍니다. 특별한 추억이 있어서 엄마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나 엄마가 교사로 재직했던 학교에도 가보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44세에 혼자가 된 74세의 엄마가 자주 가거나 산책하기 때문에 엄마의 시간들이 그만큼 많이 녹아있는 곳도 함께 걸어 보고….
그러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이야기하고, 나누고, 그리고 느끼게 됩니다. 어렸기 때문에 몰랐던 오래 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아버지나 엄마에게 섭섭했던 것도 스스로 풀게 되고, 엄마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알게도 되고…. 엄마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면 세상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엄마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 귀한 것들을 듣게 됩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 (해군)(해군) 훈련병으로 야간에 훈령 중일 때 훈련장 밖 담 가까이에 서서 장병들 함성 소리가 날 때마다 기도를 하며 밤을 지새웠던 이야기. 오래 전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아들은 "왜 그러셨어요? 훈련병이 얼마나 많은데요. 누가 내지르는 소리인 줄도 모르는데…"라고 말끝을 흐리고, 엄마는 그에 답하죠. "누구든, 네 소리로 들렸어"라고.
이미 오래전에 두 딸 아빠가 된 저자가 엄마가 왜 그랬는지 몰라 그처럼 묻지 않았겠지요. 여하간 엄마와 함께 그 훈련장을 그날 걸었기 때문에 알게 된 엄마의 마음은 두고두고 엄마를 그리워하게 하고, 힘이 되겠지요. 아들을 군대에 보낸 후 한동안 나도 그랬던 것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유독 사랑이 많은 부모님과의 일들이 조각조각 떠올라 뭉클하게 읽은 부분(64~65쪽)이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하모니카 구멍 하나하나가 내가 다닌 진해의 골목 하나하나와 비슷한 것 같아. 이 작은 구멍에다가 얼마나 자주 날숨과 들숨을 불고 들이켰는지 넌 모를 거다. 하모니카란 악기는 참 묘해서, 숨의 세기와 빠르기가 조금만 차이가 나도 소리가 달라. 듣는 사람은 몰라도 부는 사람은 확실히 안단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백 번 불면 백 번 전부 다른 소리가 나. 이번에 너와 함께 다녀보니, 골목도 마찬가지더라. 적어도 백 번 아니 천 번은 오간 골목도 달라 보이고 또 달라 보였어. 골목을 넓히거나 새 건물이 들어선 것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낯선 구석이 눈에 띄는지. '하모니카는 골목이다.' 이런 문장을 써도 괜찮을까? 하모니카가 어떻게 골목일 수 있느냔 항의를 듣진 않을까? 혹시 그런 독자가 있으면, 진해로 오십사 말씀드려. 그럼 내가 골목을 다니며 하모니카를 불어 드릴 테니까. 솜씨는 변변하지 않지만, 하모니카의 구멍과 진해의 골목에 대해선 상세히 설명할 수 있어."-176쪽~177쪽.<엄마의 골목>은 '좁게는 내가 사는 동네부터 넓게는 내가 사는 나라를, 여행도, 관광도 아닌 산책을 통해 나를 찾자'는 의도로 기획된, '걸어본다' 시리즈 그 11번째 책입니다. 겉으로는 엄마와 함께 걷는 일, 걸어가 만나는 어떤 길이지만, 보다 깊은 의도는 엄마가 걸었던 수많은 삶의 골목들을 통해 나를 찾자는 것인데요. 한마디로 인상 깊네요.
이 책을 뭉클하게 읽으면서 '이런 기획 괜찮다. 좋다. 다른 책들도 읽어 볼까?'의 생각까지 했습니다. 엄마와 함께 걷는 길 또는 골목들이 많이 알려진 곳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일상이 녹아든 곳들이라 정감이 있어 더욱 좋았고요.
엄마와 엄마가 알고 있는 진해의 여러 곳 또는 골목들을 걷는 이야기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만나거나 걷는 삶의 골목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골목>에는 44세에 남편을 사별한 후 30년을 살아낸, 당시 돈이 들어갈 일과 마음 쓸 일이 많은 청소년이었던 두 아들을 키워내야만 했던 엄마의 수많은 삶의 골목들이 나옵니다.
엄마에 대해 쓰리라 마음 먹고서도, 간절히 바라면서도 쓰지 못하고 있던 터라 엄마 생각을 참 많이 하면서 읽었습니다.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가 좋아하시는 음식들이나 곧잘 잘해주시곤 하던 음식들을 먹던 것들이 떠올랐고, 그와 함께 '언제부터 좋아하셨을까?' 생각하게 되고, 특별한 장소 이야길 읽으며 외할머니와 남산 계단을 오르던 사진 속 엄마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면서.
그리고 부쩍 궁금해졌습니다. 유행이 한참 지났는데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엄마의 구슬백이, 구슬백이 들어있던 작은 장 속의 물건들과, 그 물건들의 저마다 사연 또는 이유들이.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칠 남매를 위해 부단하게 걷고 걸었을 엄마의 수많은 골목들이. 아마도 많이 고단했을, 힘들어서 많이 외로웠을지도 모를 엄마의 삶의 골목, 골목들이.
엄마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쓸까? 힌트를 얻었습니다. 엄마가 곁에서 떠난 후 엄마를 회고하며 쓴 글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엄마와 일정 시간을 보내고 걸으며 이야기한 것을 쓴 글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권하고 싶은데요. 이처럼 꼭 글로 써야만 하나요?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할 것. 내 삶의 시작이자 끝이랄 수 있는 엄마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엄마의 골목>(김탁환) | 난다 | 2017-03-03 | 정가: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