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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주자가 봐야 할 이 아파트의 관리비 명세서이 날 따라 지하철 수유역 개찰구에 있는 한 안내판에 눈이 갔다. 전국 소기업 소상공인 현황, 전국적으로 사업체수 354만5473개, 종사자 숫자 1596만2745명. 그 중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구성이엔드씨'란 작은 기업을 이끌고 있는 윤석구 대표(56·남)를 12일 만났다.
윤 대표를 만난 이유는 구성이엔드씨가 보유한 기술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구성이엔드씨가 1992년 건설된 서울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배관을 싹 뜯어 고쳤는데, 공사 이후 난방비와 전기료 지출이 크게 줄었다. 2016년만 해도 그로 인해 주민 전체가 절약한 돈 합계가 1억3천만 원을 넘는다.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아파트 관리비 부담도 감소했다.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만큼 에너지 사용이 줄어들었다는 뜻이 되므로 친환경적이다.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는 노후 아파트 개선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사점이 있다. 2025년이면 준공된 지 30년이 지난 아파트가 320만 가구 이상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많은 아파트를 다 허물고 새로 지을 수 없다. '돈'이 안 되는 재건축에 건설사가 덤벼들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결국 주민들 스스로 고쳐가며 살아야 하는데, 그로 인한 공사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런 시도를 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경우는 사실상 대안이 없다. 이른바 '땜빵'말고는 답이 없는 집의 가격 하락은 불가피하다. 많은 전문가들이 노후 아파트 '슬럼화'를 우려하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안철수 후보도 강조한 'R&D 역량' 강한 기업
그런데 구성이엔드씨가 국내 최초로 도입한 '통합 배관 방식'은 공사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난방 배관과 온수 배관을 분리하는 4배관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구성이엔드씨는 이를 하나의 배관으로 통합하는 2배관 방식으로 시공한다. 각 가정에 공급되는 열원으로 방을 따뜻하게 하고, 따뜻한 물도 나오게 한다. 배관 숫자를 줄였으니 공사비도 줄어든다.
구성이엔드씨는 냉난방 관련 특허만 8개를 소유하고 있다. 에너지 절약형 중앙집중식 난방 및 급탕 시스템, 통합배관시스템을 위한 유량제어시스템, 흡착식 냉난방 장치 등 기술로 국내 특허 6개, 미국과 일본에서도 각각 특허를 취득한 상태다. 그 면면에서 드러나듯 거성이엔드씨는 에너지 절약 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직접 시공도 하는 회사다.
이 정도면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특히 자주 언급하는 'R&D 역량'이 강한 중소기업으로 볼 만하다. 그래서 윤 대표에게 처음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혹시 요즘 와 닿는 공약이 있나. "너무 포괄적"이라고,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진 윤 대표의 말.
"가장 어려운 부분이, 기술을 갖고 있어도 제도권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겁니다. 일단 제도권에 들어가야 확장성을 가질 수 있는데, 그래야 큰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연구·개발을 꽤 많이 하거든요. 그렇게 남들이 손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데... 그게 참 어려워요."에너지 절감 효과 3천억원 규모... 그런데
구성이엔드씨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어온 것은 분명해 보였다. 우선 우리나라 아파트는 4배관 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러하지만, 유럽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한다. 4배관도 쓰지만 2배관도 많이 쓴다고 했다. 2배관 방식의 시공을 위해서는 고온의 열원을 가정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온도와 압력을 조절해주는 '유니트(장치)'가 꼭 필요하다.
윤 대표가 주목한 지점이다. 2배관 방식이 4배관 방식보다 상대적으로 친환경적이고 공사비를 절약할 수 있어 사업적 경쟁력이 높다고 판단, 핵심 부품인 '한국형 유니트' 개발에 나섰고 그 결과 나온 특허 제품이 '퓨어화(Pure-HWA)'다. 그리고 이 제품은 에너지기술연구원으로부터 유럽 유니트보다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얻었다고 한다. 윤 대표 표현대로라면 '제도권' 진입을 위한 1단계를 통과한 셈이다.
그 다음으로는 실제 건설 현장에서의 실증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구성이엔드씨는 '퓨어화'를 핵심으로 하는 통합배관방식을 2012년 서울 가양동 소재 한강타운 아파트 60가구에 시범 시공했고, 2014년에는 앞서 소개한 서울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332세대에 성공적으로 시공함으로써 상업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윤 대표가 산출한 에너지 절감액은 3천억 원 규모.
"2년 동안 우성 아파트 에너지 사용량을 계속 모니터링했어요. 시공 전과 비교했을 때 전기·난방 에너지 사용량을 13.65% 절감했더라고요. 현재 지역난방 보급 세대가 250만 가구 정도, 중앙난방 이용 세대까지 더하면 500만 가구 정도입니다. 이들 세대 난방 방식을 리모델링한다고 가정했을 때 전체적으로 3천억원 이상 정도 절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오더라고요. 국가적으로는 그만큼 온실가스 배출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이죠."희소식이 이어졌다. 작년 7월 25일부터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에도 통합 배관 시공이 가능하도록 한국지역난방공사 규정이 바뀌었다. 구성이엔드씨로서는 제도권을 '코 앞'에 두게 된 셈이다. 대형 건설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공사 원가 감소가 가능하면서도 에너지 효율 등급은 올릴 수 있는 제품이고 시공방법이니 건설사들로서는 굳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정작 '도장' 찍기가 어렵다.
제도권 안에 들어가려다 확장성을 잃는 경우
일부 현장에 납품이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리모델링 시장의 경우는 우성 아파트 사례 이후 신규 계약이 체결된 곳이 없다고 했다. 작년 매출은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저조했다고 한다. 이어 윤 대표로부터 확인한 매출액은 직원 18명이 달성한 것으로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구성이엔드씨 입장에서는 '퓨어화' 개발을 전후해 회사 체질을 R&D 중심으로 바꾼 것이 오히려 물음표를 키운 셈이다.
- 왜 그럴까요?"노후 아파트 대부분 장기수선충당금 확보가 쉽지 않아요. 배관을 바꾸는 공사를 할 만한 충당금 자체가 축적된 경우가 드물어요. 그때그때 뭐 고장나면 '땜빵'할 여력 정도만 있어, 그냥 있는 대로 사는 쪽으로. 또 주민 대표 입장에서는 새로 뭔가를 한다는 게, 귀찮을 수 있고, 오해의 소지도 있고, '혹시 잘못 되면 어쩌나'하는 부담도 되고요.
건설사들 경우는 아직 확신을 못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기존의 '틀(4배관 방식)'을 바꿔야 하는 거니까. 또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반감이 작용할 여지도 있고요. 그렇다 보니 주춤하는 것 같습니다. 2012년 가양동 실증 시공 성공 이후 다섯 번 겨울을 났는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죠."
시간은 곧 돈이다. 특히 R&D 역량으로 승부를 보려는 중소기업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승부를 보려면 한 라운드, 한 라운드를 버텨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자금 상황이 대기업보다 열악한 중소기업에게 그것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적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제도권' 코앞에서 후퇴하거나 심하면 무너지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그 제품을 확산시키려면 결국 제도권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상당히 어려워요. 그렇게 진을 빼다 보면 그 지점에서 많은 손실을 보죠. 그러다 확장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희도 많은 시간을 까먹었어요. 아무래도 중소기업은 국내 시장이나 해외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이나 영업망이 부족하니까요."유권자 1500만 명이 꼭 듣고 싶어하는 말
- 이런 공약 좀 내놓지, 그런 게 있다면?"중소기업 관련 부서나 조직이 참 다양하게 많잖아요? 다들 노력하시긴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실제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도움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수집해서 보고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중소기업 이야기를 깊게 듣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쪽으로 공무원 체계가 '원-스탑' 형태로 됐으면 좋겠어요. 특히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마케팅과 같은 부문, 같이 고민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맞춤형 컨설팅 지원 체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 대표의 이 말 역시 명확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돈도 중요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보다는 조직, 중소기업과 제도권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는 것.
또 하나 분명한 것이 있었다. 중소기업 사장님들 귀가 번쩍 뜨일 정도로 명확한 공약을 내놓을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는 것. 사장님들이 내놓을 답이 아니라는 것. 수유역 개찰구 안내판만 보더라도, 그런 '답'을 기다리는 이들이 1500만 명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