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만큼 아는 분들이고, 배울 만큼 배운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 참 '없어 보입니다'. 물론 정치인이 표를 의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표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정치는 독재 등으로 대의제가 망가진 상황에서나 가능하죠. 그러나 표를 의식함에 있어, '사회적 다수에게 만족을 주는 방식'만 고수해선 곤란합니다. 기존의 '사회적 다수'가 만든 시스템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런 다수를 소신껏 이끌어 내어 내 표로 '만드는' 정치인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리더십이라고 부르죠.
이른바 '유력 대선주자'로 불리는 후보들 중 4인의 남성 후보들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던 문재인 후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20일, 보수 개신교계가 개최한 '제 19대 대통령선거 기독교 공공정책 발표회'에 이들 후보를 대신해 나온 각 캠프의 대표자들은 작심이나 한 듯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헌법에 적어놓은 나라에서 '기독교 정책 발표회'를 열고, 거기에 각 대선 캠프에서 한 사람씩 나와서 대표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문제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하겠다는 '기독교 정책'이, 가난한 자에게 베풀고 병든 자들을 쉬게 하는 정책이 아닌 젠더차별, 젠더폭력 정책이라면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저는 이날 행사에서 각 캠프별로 나온 성소수자 차별 혹은 혐오 발언을 인용하고, 이 발언이 무엇이 문제인지 하나 하나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각 후보를 지지하는 분들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함께해주시길 호소드립니다. 다른 나라들이 '성소수자 인권을 어떻게 보호할지' 토론하는 동안 모든 대선 후보가 입을 모아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는 것, 심각한 일입니다. 먼저 문 후보부터 보겠습니다.
[문재인 후보 측] 김진표 의원 (국민일보 4월 20일)"동성혼 법제화에 반대하는 기독교계의 주장에 깊이 공감.""민법상 동성혼은 허용돼 있지 않으며,동성애 동성혼은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렵다.""출산율이 낮은 여건 등을 고려할 때 동성혼 허용하는 법률 제정 않도록 적극 노력하겠다."전세계 선진국들이 동성혼을 법제화했고 지난해엔 미국까지 법제화에 성공하면서 동성혼이 꽤 오래 이슈였죠. 재미있는 사실은 김진표 의원은 이날 '동성혼 법제화'라는 용어를 썼는데, 보수 기독교계는 그간 '동성혼 합법화'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저는 김 의원의 발언을 기사로 접하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애초에 동성간 사실혼 등이 '불법'이 아니므로 '법제화'라는 용어로 대체하자고 주장한 게 저였거든요.(관련 기사:
'터미네이터 너마저도' 동성결혼법 열광한 이유)
민법상 동성혼이 허용돼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현행 민법이 위헌이라면 바꿔야죠.그런 위헌적인 법률을 고치라고 국민들이 의원으로 만들어 준 사람이,바로 발언의 주인공인 김진표 의원입니다. 본인의 역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전히 후진국 수준인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는 '정치'가 '국민 정서'를 따를 일이 아닙니다. 교육과 홍보 등을 통해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아가야 할 사안이죠. 현행 고등학교 법과 정치 교과서에는 정당의 기능으로 대중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을 교육하는 기능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공당으로서의 직무 유기입니다.
'출산율을 근거로 동성혼 금지'는 차라리 웃으라고 하신 말씀이라면 좋겠습니다.알기 쉽게 설명드리면 동성부부는 '불임부부'입니다. 임신을 할 수 없는 부부예요. 저 논리면 가임여성은 불임남성과 사랑해도 결혼하지 못해야 맞습니다. 이렇게 바꾸어 말하니 어떻게 들리십니까? 얼마나 차별적이고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인지, 느껴지십니까?
[안철수 후보 측] 문병호 최고위원 (뉴스앤조이 4월 20일)"동성애 동성혼을 허용하는 법률 제도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역차별."한국에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이야기할 땐 항상 다른 것과 비교해야 합니다. 그만큼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단 뜻입니다. 하여 뜻하지 않게 제 칼럼마다 소환되는 (그래서 이젠 소환에 따른 술값까지 요구하기 시작한) 제 친구가 하나를 소개합니다.이 친구는 한국인이지만 드물게도 힌두교 신자입니다. 힌두교는 소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죠. 기독교가 동성간 성관계를 금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친구로부터 제가 소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소고기 섭취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질환들에 대해 설교하거나, 한우를 홍보하는 광고를 두고 '힌두교 역차별'을 한다는 따위의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힌두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본인의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것을 하지 않을 뿐, 누구에게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힌두교 신자들이 축협 앞에 모여 시위를 한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실제로 힌두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성소수자 인권행사마다 확성기를 들고 모여듭니다. 기독교가 동성간 성관계나 성전환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실천하면 될 일입니다. 그 누구도 성소수자간의 사랑과 제도적 결합에 종교를 근거로 반대할 수 없으며 그것이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홍준표 후보 측] 안상수 의원 (크리스천투데이 4월 20일)"차별금지법 제정 반대한다."네, 저도 대학 시절 성폭행을 모의했다고 자서전에 보란듯이 써 올린 분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반대하겠습니다. 가사 노동은 여성들에게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는 분이 대통령하는 것에 반대하겠습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에 반대하는 분이 대통령하는 것에 반대하겠습니다.
[유승민 후보 측] 이혜훈 의원 (뉴스앤조이 4월 20일)"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동성애를 옹호 조장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전통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등 기독교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혜미넴', 이혜훈 의원 역시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도록 하는 법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를 차별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는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근거로 하신 말씀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이는 '때리면 처벌받는 법에 반대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안 때리면 될 일입니다. 왜 성소수자 차별에 처벌받을 일을 걱정하십니까? 차별을 안 하셔야지요.
성소수자 차별 없이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존재할 수 없습니까? 성소수자 차별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입니까?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는 위헌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가 되는 셈입니다.인신매매나 집단폭행같은 폭력으로 '사이비'로 불리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선 후보와 의원들, 나중에 부끄럽지 않을 자신있나?이달 중순, 성소수자 군인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속'되는 일이 있었습니다.이 과정에서 영장도 없이 압수수색이 이뤄지고 성행위 여부 등을 집요하게 캐묻는 등의 인권 유린이 있었고요. 국가의 행정력이 성소수자 혐오에 직접 투입된 첫 사례로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무겁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일, '기독교 정책 발표회'에 유력 후보의 각 정당에서 한 명씩 나와 성소수자 차별 발언을 합니다. 장소가 장소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말은 하지 맙시다. 이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명백한 성소수자 차별 발언들이자 한국 성소수자 인권 역사에 남을 대참사입니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보수적인 분들께도 한 말씀 드립니다. 각 캠프의 저 발언들, 큰 의미 두지 마십시오. 저들의 발언은 이 사회의 압도적 다수이자 권력인 보수 기독교의 표를 위해 극소수에 불과한 성소수자 때리기를 선택한 것일 뿐 '실천적 성소수자 차별 공약'일 수 없습니다. 후보 선택에 큰 비중을 두실 일이 아닙니다.
자리에 불참한 심상정 후보의 옛 인터뷰 내용처럼, 차별금지법은 이미 추진되고 있고 국회도 뜻을 함께하고 있으나 아직 사회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뿐입니다. 한국 사회는 언제나 절벽인 듯 보이지만 늘 바른 곳을 향합니다. 늦게나마 유신의 끝을 탄핵으로 맺은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반드시 성소수자 인권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이들은 자신의 발언을 다시 한번 되돌려보길 바랍니다. 어쩌면 홍준표 후보의 자서전의 일부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때 가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부끄럽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