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생긴 국도 3호선에서 비켜나 있다. 그렇지만 옛 길을 따라 들어가면 후회 없는 휴식을 얻을 수 있다. 4월 22일 경남 진주에서 거창 가는 길에 잠시 빠졌다.
꽃잔디 축제가 한창인 국제조각공원에서 분홍빛 꽃구경을 한 뒤에 산청박물관을 들렀다.
공원 내에 있는 산청박물관은 소박하다. 꾸밈이 없다. 수수하다. 기대를 별로 하지 않는다면 관람하기 편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1층에 있는 영상실을 지나 2층 전시실로 향한다. 올라가는 계단에서 만나는 것은 산청 소개다. 2008년 6월 기준으로 인구 3만 5059명을 비롯해 간단명료하게 산청을 소개받으며 오른쪽으로 따라 천천히 관람했다.
'지금의 산청군은 산음과 단성을 통합한 군으로~' 시작하는 산청 내력을 살핀 뒤 가야 시대를 비롯해 기증 유물들을 구경했다. 전시된 유물들은 국보나 보물은 없다. 오히려 그래서 수수하다.
기대하지 않고 편하게 구경하면 좋은 곳조선 시대 철종 12년(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속의 산청을 살피면서 인근 서부경남도 덩달아 알아보는 시간이다. 고지도 속 산청을 살피고 나오면 삼우당 문익점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 신의 류의태 선생, 퇴옹 성철스님까지 산청에서 태어났거나 깊은 인연을 맺은 4명의 영정과 간단한 이력들이 나온다.
삼우당 문익점 선생은 1331년 단성면 사월리 배양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350년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붓대롱에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 당시 의복생활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남명 조식 선생은 1501년(조선 연산군 7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냈다. 아직 논란이 가시지 않은 류의태 선생도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로 유명한 성철 스님은 단성면 묵곡에서 태어났다.
박물관이 있는 공원 내에 있는 생초 고분군에 관한 설명도 나온다. 생초 고분군은 가야시대 고분으로 돌덧널무덤(석곽묘) 수백여 기 이상이 조성된 곳이다. 출토 토기를 구경하며 걸음을 옮기면 가야에 관한 안내문들이 나온다.
기증 유물 사이를 지나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돌덧널무덤(석관묘), 돌방무덤(석실묘)까지 모형과 함께 자세히 설명한 전시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 땅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정신 세계가 펼쳐지는 듯하다. 문득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내가 서 있는 기분이다.
'어느 공동 묘지에 세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 빈손으로 오십시오. / 죽음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 언제나 준비하십시오. 죽음은 때가 없고 순서도 없습니다.'무덤 양식을 소개한 전시대에서 김요한이 쓴 시 < 세 개의 문(門)>이 떠오른다.
작은 역사 전시물을 나오면 목각들이 긴장을 풀게 한다. 여자 생머리를 연상하게 하는 나무 조각이 나온다. 제목이 '스타일'이다. 서로 등을 맞대고 팔을 괴고 앉은 4개의 나무 조각상들은 이름이 따로따로다. 동자, 기다림, 여유로운 하루 등이다.
뒷짐 진 사내 조각상이 저편에서 여유롭게 나를 본다. 눈이 마주친 나 역시 여유롭다. 나무 조각들을 구경하다 내려오는 길에 박찬수 설법도를 관람했다. 둥근 나무 평면에 입체적으로 조각한 설법도에 부처님의 자비로운 얼굴이 엿보인다. 내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아담한 박물관에서 과거를 만나고 현재를 보았다. 박물관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가져간 캔커피를 마시며 아래 흘러가는 경호강을 구경했다.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이다.
느릿느릿 걸으며 살금살금 다가온 봄도 마중
걸음을 옮겨 경호강변으로 향했다. 들어서는 입구는 온통 핑크빛이다. 꽃잔디가 흐드러지게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생초면 시외버스정류장 앞에는 늘비물고기촌이라는 간판 위로 물고기가 축구공을 꼬리로 차는 조형물이 있다. 산청군 생초면 늘비공원이다.
하얀 쌀밥이 옹기종기 붙은 형상인 돌단풍이 화단 속에서 반긴다. 녀석에게 잠시 마음을 준 뒤 그늘막 아래 긴 의자에 앉았다. 오가는 차들은 무심한 듯 지나간다.
밥알같은 꽃들이 알알이 박힌 박태기나무가 내 뒤편에서 진보랏빛으로 웃는다. 개나리와 앞다퉈 피었던 벚꽃은 이미 지고 난 뒤지만 쏠쏠하고 아담한 풍경이 마음 넉넉하게 햇살과 함께 걷게 한다. 강둑으로 올랐다. 오른편 지리산에서 발원한 엄천과 덕유산에서 발원한 위천이 서로 만난 경호강을 벗 삼아 둑을 걸었다. 바람이 살포시 어루만지고 간다. 발아래는 제비꽃들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개나리들이 노랗게 쫑쫑 거린다. 튀긴 좁쌀을 붙여 놓은 것처럼 고소하고 귀여운 조팝나무 꽃가지가 바람에 춤춘다. 꽃들이 봄바람에 춤을 추는 너머로 이수동의 <동행>이라는 시가 돌에 새겨져 있다.
'꽃 같은 그대/ 나무 같은 나를 믿고 길을 나서자/ 그대는 꽃이라서 10년이면 10번은 변하겠지만/ 나무 나무 같아서 그 10년,/ 내 속에 둥근 나이테로만 남기고 말겠다./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길 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덕분에 내 가슴 속에 사라지지 않는 꽃향기를 품었다. 꽃사과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 공원을 계속 거닐었다. 공원 가운데에 이르자 다시금 생초물고기 마을을 알리는 글자 사이로 물고기 조형물이 나온다.
앞에는 민물고기 마을 유래가 새겨진 돌이 있다. '지리산 청정수를 담아 거울같이 맑고 푸르다는 경호강을 끼고 있는 생초면은 깊고 큰 소(沼)가 여러 개 있다. ~ 쏘가리, 꺽지, 피라미, 잉어 등 다양한 물고기가 많이 잡히며~ 대를 이어~민물고기 전문 식당이 형성되어 민물고기 마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고 적혀 있다.
뒤편으로 옛 국도 3호선을 따라 민물고기 전문 식당들이 즐비하다. 수족관에 뛰노는 물고기들의 은빛이 빛난다. 큰 애를 가졌을 때 아내를 위해 피라미 튀김을 먹었던 옛 추억에 입가에 침이 고인다. 처가 식구들과 이곳에서 어탕국수를 먹었던 기억까지 더불어 일어나면서 걸음을 차마 옮길 수 없었다.
근처 정자 옆에 있는 연둣빛으로 새순 돋은 느티나무 아래에 앉았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가장 신비로운 순간을 함께하며 캔 커피를 마셨다.
느릿느릿 걸으며 살금살금 다가온 봄도 마중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봄과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나 자신이 고맙다. 다음에는 가족과 함께 피라미 튀김도, 어탕국수도 맛볼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