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정도 여유가 생긴 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피곤하게 꾸미고 다니기는 싫고, 그렇다고 무거운 실내에 계속 있기보다는 가볍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을 때 바로 그런 날에 빵을 사러 돌아다녀 보는 건 어떨까?
느닷없이 '웬 빵이야' 하겠지만 요즘의 맛집 탐방 트렌드를 반영하듯, 개성 넘치는 빵집이 무척 많아졌다. 간식거리, 혹은 저녁거리라도 건져올 겸 이곳저곳을 한 번 돌아다녀보자. 분명 정겹고 또 맛있는 빵들에 반하고 말 테니.
오전과 오후의 중간 쯤, 따뜻한 햇살이 만들어내는 포근한 시간에 만연한 봄기운을 받으며 별다른 준비 없이 길을 나서면 된다. 목적지는 우면동. 서울에서도 구석진 동네다. 양재역에서도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 동네를 지나가고 있으면 '이런 데야말로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잠깐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버스에서 내려 약간의 오르막을 지나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상가를 끼고 돌면 자그마한 입간판이 고개를 싹 내밀어 반겨준다. '뭐지?' 하고 무심코 간판을 읽어보려는 찰나, 무방비 상태에서 구수한 빵내음이 온몸을 확 감싸고돌아 잠시 멈칫하고 마는데, 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유혹당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순간이 바로 이 때다.
우리 밀, 사워도우, 무반죽법으로 빚는 빵. 언젠가 모 달인 프로에도 나온 적 있는 빵집이다. 아직은 빵이라고 하면 식사보다는 간식 혹은 후식 정도로 많이 인식하고 있지만 이곳의 빵들은 밥 대신 먹는 담백한 종류의 식사용 빵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이곳이 유명해진 데에는 다양한 크림치즈가 두툼하게 올라간 조금은 자극적인 빵이 크게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도 베이스가 되는 빵 자체의 맛이 특별하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이 찾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자그마한 실내, 그리고 커다란 오븐. 한쪽 벽에 장식으로 쌓여있는 무수한 빵들. 첫인상은 그랬다. 지금은 사람이 많아 그 좁은 공간이 북적해졌지만, 전엔 한적한 광경과 구수한 빵 그리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셰프님이 어우러져 그 나름의 소소한 분위기를 자아냈었던 가게다.
"물맛도 중요해요." 이곳을 방문한 지 한두 번 쯤 됐을 무렵에 셰프님께서 다른 분과 하시던 말씀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각종 첨가제를 사용하지 않고, 앉은뱅이 통밀과 호밀 그리고 우리 밀을 사용해 만드는 건강한 느낌의 빵들. 요즘 비슷한 문구를 내걸고 건강빵을 파는 곳이야 많고 많지만 이곳의 빵엔 셰프님의 흔적이 묻어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이런 종류의 빵을 처음 먹는 사람이라면, 어른들이나 먹는 거칠고 딱딱한 맛없는 빵이겠지 라는 생각부터 들겠지만, 반전매력처럼 그게 맛있음으로, 또 새로움으로 다가온다면 솔깃하지 않을까? 크림빵, 앙금빵, 그리고 케이크 등 자극적인 것만 찾던 내가 자꾸 생각나 찾게 되는 빵들이 이곳에 있다(물론 자극적인 건 지금도 계속 먹고 다닌다).
밤이나 콩이 들어간 빵, 프룬(건 자두)과 견과류를 넣은 빵과 치즈를 올린 빵 그리고 각종 프레첼들에서 팥빵이나 식빵, 바게트 같은 기본 빵까지 얼핏 종류가 적어보여도 식사용이나 소소한 간식으로 잘 어울리는 메뉴들이 갖추어져 있다.
물론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건 앞에 잠깐 언급했던 다양한 크림치즈와 몇 가지 종류의 빵을 조합해 살 수 있는 크림치즈 브레드들. SNS에서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데 종류도 다양하고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조합이 눈길을 확 사로잡는다.
"빵집이 아니라 베스킨라빈스가 라이벌이에요"라고 셰프님이 농담삼아 말씀하신 적이 있을 정도로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계절이나 월 별로 제철 재료들을 이용해 크림치즈를 만드시니 종류가 계속 바뀌어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도 더해주고 한층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빵도 구경하고 이것저것 고르다보면 화덕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오븐에서 빵이 구워져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훅 하고 다가오는 열기를 마주하던 지난 여름날이 아직도 기억 난다. 좁은 작업실의 무더운 열기와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지는 빵들엔 무반죽법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오래 연구하신 셰프님만의 노력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어쩌면 이런 빵이 있을 곳으로는 북적한 번화가보다는 우면산 근처 아파트 단지 한쪽의 자그마한 가게가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빵을 사서 나올 때쯤엔 빵내음에 취해서인지 묘하게 푸근해진다. 때마침 날도 따뜻하다보니 근처 공원에라도 들러 맛있는 빵을 놓고 여유를 만끽하다 오고 싶어진다. 전에는 가벼워진 발걸음에 양재역까지 걸어본 적도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사 온 빵인데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첫 번째는 무화과 호두 사워도우 빵. 사워도우(sourdough)란 반죽에 들어가는 발효종의 일종. 자세하게는 몰라도 시큼한 맛이 있는 특유의 풍미가 인상적인 발효종이란다. 물론 건강에도 좋고. 요 사워도우로 만든 빵 속에 무화과랑 호두를 큼직하게 썰어 속을 채운 게 바로 이 빵. 보통 이런 계열의 빵들은 겉은 조금 거칠면서 속은 밀가루에 따라 다르지만 무게감 있으면서 조금은 차진 떡과도 살짝 비슷한 식감을 가졌다.
빵 자체의 맛은 구수하고 거기에 무화과의 달콤함과 호두의 고소함이 풍부하게 더해진다. 아마 단팥빵 같은 빵을 상상했다면 심심하네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식사대용으로 먹는 빵에 가깝기 때문에 너무 자극적이면 금방 질려버릴 것이다. 물론 무화과랑 호두의 인위적이지 않은 맛이 자극적인 맛과는 다른 매력으로 충분히 심심함을 매워주고 남아 계속 손이 가기 때문에 간식으로 먹기에도 그만이다. 끝 맛에는 호밀과 사워도우의 시큼한 맛도 살짝 도니 한번 조용히 음미해보는 것도 좋은데, 이런 맛이 생각 외로 중독성이 있어 취향에 맞는다면 푹 빠져버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 빵은 슈퍼 그레인 레몬크림치즈. 슈퍼 그레인 빵이라는 해바라기 씨나 호박씨 등 씨앗 류가 들어가 고소한 맛이 일품인 빵 속에 레몬크림치즈를 채워 넣어 상큼하고 부드러운 맛을 더한 빵이다. 이것도 제법 묵직한 식감을 가져 먹고 나면 든든해지는 빵. 씨앗 류가 가득 들기도 했지만 빵 자체에서도 고소한 맛과 구수한 풍미가 듬뿍 올라오기 때문에 은근히 빵만 먹어도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레몬크림치즈는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맛에 가벼우면서 상큼한 느낌을 더해준다.
이 두 가지 빵들은 그냥 먹어도 즐겁지만 오븐이나 팬에 한 번 구워 먹으면 맛과 식감이 상당히 풍부해지니 꿀 팁으로 살짝 알아두자.
마지막 빵은 앙생크림치즈인데 앙은 팥앙금을 말하고 생크림치즈는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생크림과 크림치즈를 섞어 만든 것이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크림치즈 브레드의 원조 격 되는 빵인데 최근에는 이것 말고도 정말 신기한 조합이 늘어났다. 아무튼 요 빵은 두툼하게 올라간 팥앙금과 생크림치즈의 비주얼이 '와 맛있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흡사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어 절로 입이 떡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속 재료가 재료이니만큼 앞의 두 빵보다는 훨씬 자극적이고 대중적인 입맛에 가까운데 '혹시 너무 달까' '살찌는 거 아냐' 라는 우려가 혹시 생기더라도 먹어보면 그런 느낌은 다소 줄어들 것이다. 이곳의 팥앙금은 설탕을 줄여 다른 단팥빵들의 팥앙금과 비교해 확연히 당도가 적다는 게 직접적으로 느껴지고, 팥 알갱이를 씹을 때면 팥 특유의 구수하고 고소한 맛이 풍부하게 드러난다.
호두가 들어 있는 것도 포인트. 생크림치즈는 그냥 크림치즈만 먹으면 무겁고 새콤함이 강할 수 있는데 생크림이 들어가 한층 부드러운 맛을 더해주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딱 여심을 사로잡기에 좋은데, 반면 팥앙금은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 좋아할 맛이니 어찌 보면 세대를 아우르는 조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빵 자체의 맛도 좋다. 기본적으로 사진과 달리 원래는 브라운치아바타라는 바삭하게 구운 빵이 사용되는데, 바삭한 식감과 씹을수록 도는 고소한 맛이 물리기 쉬운 크림이나 팥의 맛을 적당히 조절해주어 전체적인 완성도를 확 올려준다.)
적당히 빵을 먹고 나면 기분 좋은 포만감이 몸을 감싸 푸근한 기분이 든다. 일반적으로 빵을 먹었을 때의 더부룩함과는 전혀 다른 이 느낌이 '아 정말 좋은걸 먹었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반죽에 담은 내 마음이 빵의 영혼이 됩니다." 가게를 나오며 슬쩍 보고 지나간 창가에 붙어있는 문구. 그래 어쩌면 이곳의 빵에는 정말 빵집의 이름처럼 영혼이 들어있을 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공장제가 아닌 사람이 만드는 먹거리 속에는 그 사람의 신념과 세월이 녹아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테니...
쉽게 떠버리기 쉬운 하루가 정겹고 또 맛있는 기억으로 채워진다면 그것도 시간을 즐기는 한 방법이 되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