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자랑스럽게'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고, 진보는 '눈치 보며' 자녀를 서울대에 보낸다."연수를 듣는 2시간여 동안 줄곧 머리를 맴돌았던 글귀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구조 앞에서는 보수와 진보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연수 도중 무한 경쟁의 폐해와 취업난, 대량 실업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한 녹록지 않은 현실을 언급하긴 했지만,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고등학교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대학입시, 단 하나뿐이었다.
얼마 전 광주광역시 교육청이 주관하는 현직 고등학교 교사 대상 대학입시 관련 연수회가 있었다. 최근 몇 년 간의 상위권 주요 대학별 입시전형의 변화 추이를 보여주고, 입시 실적을 내기 위해 일선 교사들이 알아두어야 할 내용들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퇴근 후의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강당을 가득 메울 만큼 교사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자칭 '1타 강사'의 분석은 명료했고, 설명은 탁월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입시전형들을 술술 꿰고 있는 그가, 같은 교사로서 부럽기까지 했다. 각 대학별로 중시하는 전형자료가 무엇인지, 대학이 선호하는 학교생활기록부(이하 학생부)와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작성하는지 등을 들려줄 때면 마치 그가 강사가 아니라, 대학의 진짜 입학 사정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에게 내신 관리는 기본이고, 학생부 종합 전형도 따로 준비해야 하며, 수능을 위한 공부도 소홀히 해서는 곤란하다. 각 전형별로 챙겨야 할 것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전형에 '올인'하는 건 위험하다.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양한 전형에 따른 치밀한 '전략'이 요구된다는 게 강의의 대강이었다.
교사 역할, 수업과 생활지도에서 입시지도로이는 수험생인 아이들이 우선 숙지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현실에서는 고스란히 학부모와 교사의 몫이 되고 만다. '전략'은 어른들이 짜 줄 테니, 너희들은 그 시간에 공부만 하라는 셈이다. '입시설명회'라는 이름으로 학부모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사교육이 창궐하고, 덩달아 교육청과 학교도 부화뇌동하여 저녁 시간 교사들을 불러 모아 연수회를 갖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교사 본연의 임무도 수업과 생활지도에서 입시지도로 무게중심이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잘 가르치는 것보다 전형에 맞도록 내신 관리를 해주고 학생부를 잘 써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업무가 돼버린 것이다. 아이들조차 수업이야 인터넷 강의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다. 교사든 학생이든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이다.
요즘 대세라는 학생부 종합 전형의 경우, 학생부 기록은 구체적이어야 하며 개별화된 내용이 아니면 입시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학이 해당 학생을 뽑아야 하는 이유를 근거를 제시하여 남다르게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자기소개서는 자신이 아닌 평가자의 시각에서 작성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며 첨삭 지도 요령까지도 일러주었다.
강의가 무르익어갈수록 부러움은 불편함으로 바뀌어 갔다. 그는 좋은 입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학에 아이들을 맞춰야 한다고 연신 강조했다. 대학이 '갑'이고 아이들이 '을'이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사실상 그것이 연수회를 연 목적이었으니 딱히 몽니 부릴 일은 아니지만, 학벌구조의 혁파를 바라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강사는 한 일간지에 정기적으로 교육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것도 진보 성향 신문에 글을 쓴다는 그가 달라진 입시전형에 맞춰 명문대 입시 실적을 높이는 방법을 소개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외려 입시전형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좌지우지하는 왜곡된 현실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1타 강사'로서 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고교 교사라면 입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지만...그는 고등학교 교사라면 '입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낮은 성적으로도 맞춤형 입시를 통해 상위권 대학에 많이 진학시킬 수 있어야 능력 있는 교사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다양한 입시전형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상위권 대학 진학이라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간절한 바람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교사의 의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가 오로지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 준비 기관이라면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교사는 교육과정에 따라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교육자'로서 한낱 입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될 존재다. 밤 10시가 다 되도록 연수 자료에 밑줄 그어가며 복잡한 입시전형을 공부하기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수업 준비를 위해 교과서를 한 번 더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꿈쩍이지 않는 현실을 핑계 삼아 슬그머니 학벌구조에 편승해선 미래세대의 삶을 걱정하는 진정한 교사라고 할 수 없다. 굳이 대학에 가지 않고도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것이 '교육자'다운 모습이다. 하다못해 웬만해선 이해하기조차 힘든 복잡한 입시전형을 단순화해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도록 정부와 대학을 압박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강사보다 행사를 주관한 광주광역시 교육청을 우선 탓할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가장 진보적인 교육 정책을 펼치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곁가지만 진보적일 뿐 '실력 광주'라는 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거칠게 말해서, '진보 교육감'도 수능 성적을 잘 내고 명문대에 많이 진학시킨다는 '찬사'를 듣고 싶은 것이다.
모름지기 '진보'라는 이름을 앞세우려면, 지역의 인재를 명문대로, 서울로 못 보내 안달할 게 아니라 그들이 지역에 머물며 지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역 대학의 질적 향상에 우선 발 벗고 나서야 옳다. 또한,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극소수 상위권 아이들보다 학업에 대한 흥미를 잃은 채 무기력에 빠진 다수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마땅하다. 종국에 지역에 남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교육청은 전가의 보도처럼 지역민의 여론을 핑계 삼는다. 여전히 수능 성적과 명문대 진학 실적으로 교육감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하소연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지역민'이란 다수를 뜻하진 않는다. 극소수 상위권 아이들의 부모가 학교의 최고 심의 의결기구인 학교 운영위원회에 포진돼 학교 안팎의 여론을 주도하듯, 교육청도 범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에게 휘둘리는 형국이다.
'고졸 성공 시대' 현실에서 구현해야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물론, 내로라는 '1타 강사'도, 수많은 교사들도, 나아가 교육청조차도 철저히 대학입시에 포획돼 있는 꼴이다. 사교육 시장이 공교육 체제를 비웃으며 그 어떤 입시전형의 변화에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우선 사회구조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둘러대지만, 이는 서로를 탓하는 무책임한 행태일 뿐, 선후의 문제일 수 없다.
자기소개서 작성법으로 강의가 마무리될 즈음, 그는 전직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쓰고 토론 능력이 탁월했던 이로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 두 분을 꼽았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다른 대통령들의 경우와는 달리 최종 학력이 고졸이었다면서, 대학 진학이 학력(學歷)을 말해줄지언정 학력(學力)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내내 '입시 전문가'가 돼야 한다며 침 튀겨가며 강조해놓고선 느닷없이 '배움이 사라진' 대학을 꾸짖었다.
이제 고등학교 교사들의 입을 통해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선언'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야 한다. '입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건 교사의 자존감을 해치는 감언이설에 불과하다. 이른바 '고졸성공시대'라는 장밋빛 구호가 한낱 대선 슬로건이 아닌 현실로 구현할 책임이, 정부와 교육청은 물론, 우리 교사들에게도 있다.
단언컨대, '깨어있는 교사들의 조직된 힘'만이 우리 교육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정부와 교육청의 지시만을 좇아 파블로프의 개처럼 움직이는 수동성을 벗어던지고 교육 개혁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언제까지 학벌구조와 대학입시의 탓으로 돌릴 텐가. '촛불 혁명'으로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낸 지금이 교육 패러다임 전환의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