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여행을 가면 부지런해지는 걸까. 그것도 '극도로' 말이다. 새벽 5시가 조금 지나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어느새 몸은 침대를 벗어나 있다. 알람에 의존해야만 했던 평소의 아침이 아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고, 미리 사뒀던 물을 시원하게 들이킨다. 아, 호텔의 냉장고에 비치된 (물을 포함한) 음료는 워낙 비싸니까 손을 대지 않도록 하자. 숙소로 돌아오기 전, 인근의 슈퍼(가 없다면 자판기)에서 물을 사오는 센스가 필요하다.
곧바로 아침 샤워를 하고, 가벼운 트레이닝 복을 입는다. 조식이 제공되는 시간(보통 07:00에서 08:00 사이에 제공된다. 호텔을 예약할 때 체크하도록 하자)까진 제법 시간이 남아 있다. 뭘 하려고 그러냐고? 낯선 곳에 여행을 와서 대관절 할 일이란 게 무엇이겠는가. 걷는 것, 바로 산책이다. 등잔 밑에 어둡다고,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숙소 주변을 샅샅이 훑을 시간이다.
여행 일정을 짜다보면 매번 욕심이 생겨서 빡빡한 계획을 짜게 되는데(그러지 않으려고 의식해도 이상하게 늘 그렇다), 그러다보면 '주요 관광지' 위주로 동선이 짜이기 마련이다. 가령, 프라하를 여행한다고 치면 당연히 프라하 성, 카를 교, 구시가 광장, 바츨라프 광장, 유대인 지구가 포함될 테고, 어쩌면 이게 전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여행이라면 주요 관광지만 후루룩 훑고 지나가는 패키지 여행과 다를 게 무엇이라 말인가.
그래서 '아침 산책'이 중요하다. 도시가 미처 깨어나기 전, 그 어떤 구애(拘礙)도 받지 않고 그저 발길 닫는 대로 마음껏 걷는다. 아직 단장을 채 마치지 않은 도시는 신선하고 또 거짓이 없다. 그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 좋다. 그래서 아침 산책이 소중하다. 여행을 위해 방문한 도시(都市)와 보다 밀착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 도시의 좀더 내밀한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방문자를 위해 깔끔하게 차려입고서 훈련받은 예의와 매너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격식이나 경계 없이 그저 1:1로 마주하고 싶어진다. 대우받는 게 아니라 그저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정의이자 여행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내가 왜 여행을 가면 부지런해지는지 알 것 같다. 체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왜 그토록 걷고 또 걷는지 알 것 같다.
숙소가 있는 안델 역 인근에 인상적인 외관의 교회가 하나 있다. 붉은 빛을 띠는 벽과 쌍둥이처럼 솟아 있는 두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다. 바슬라바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건물은 낮에도 품위가 있지만, 어둠이 깔린 뒤에 훨씬 분위기가 있다. 은은한 조명에 포근히 감싸인 외관을 지나치노라면, 하루의 고된 여정으로 지친 발걸음이 숙소로 향하던 속도를 줄이고 이내 멈춰선다. '종교'를 초월한 위안이 느껴졌다.
바슬라바 교회를 지나 큰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600m 정도 올라가다보면 오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 늠름한 자태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바로 프라하의 법원(法院)이다. 건물 중앙 부분에 'justiční palác'라고 씌어져 있는데, 'justiční'는 체코어로 '법의', '법에 관련된'이라는 뜻이고, 'palác'는 '궁전', '전당'이라는 뜻이니 이 곳이 법원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체코어를 알고 있었냐고? 얼핏 봐도 'justiční'라는 요상한(?) 글자가 정의(正義) 또는 사법, 재판을 뜻하는 영어인 'justice'와 닮아 있지 않은가. 간단히 말해 때려맞힌 것인데, 'justice'의 어원이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에서 비롯된 것을 감안하면, 그와 비슷한 꼴의 글자를 같은 뜻으로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이미 제법 걸었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북으로 전진해보자. 법원으로부터 약 3,400m쯤 더 걸어가면 공산주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동상이 나온다. 언덕 위쪽으로 계단이 이어지고, 청동상들이 늘어서 있다. 체코의 공산 정권(1948~1989) 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동상은 체코의 조각가 올브람 주벡(Olbram Zoubek)의 작품이다.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괴한 느낌이 드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몸에 금이 가 있고, 신체의 일부가 사라져 가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바닥에는 공산 정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숫자가 기록돼 있다. 205,486명 체포, 248명 처형, 4,500명 감옥에서 사망, 327명 탈출 시도하다 총격 사망, 170,938명 망명.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 숫자들의 의미를 새기는데, 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이번에는 블타바 강(Vltava River)변으로 가보자. 안델 역에서 블타바 강까지의 거리는 불과 500m에 불과하다. 체코에 여러 날 머물 예정이라면 하루는 북쪽으로, 하루는 동쪽으로 산책을 떠나보자. 강변에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는데, 이른 아침에도 제법 사람들이 눈에 띤다.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붉은 빛이 사라져가는 석양의 쓸쓸함과는 달리 붉음이 더욱 짙어지는 아침의 풍경은 걷는 이의 몸 속에 '힘'을 불어넣는다.
블타바 강은 파리의 세느 강(Seine River)보다는 폭이 넓지만, 한강에 비하면 훨씬 좁은 편이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 반대 편으로 이동하는 게 그리 버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유이라스쿠프 다리(Jiráskův Most)를 건너가면 댄싱 하우스(혹은 댄싱 빌딩)라는 이름이 기묘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독특한 형태의 유리 타워는 마치 물결치는 듯한 형태이고, 콘크리트로 된 건축물에는 불규칙한 모양의 창문이 인상적이다.
프랭크 게리(F.O.gehry)와 블라디미르 밀루닉(V.Milunic)의 작품인 댄싱 하우스는 아방가르드 건물이라 눈에 확 띠지만, 주변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색하지 않다. 낙천적이고 유희적인 이 건물은 1996년 타임(Time)이 선정한 최고의 디자인 작품인 만큼 매우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로 지어졌다. 또, 프라하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낙천적인 자유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상징적인 역할을 한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아침 산책을 마무리 할 시간이다. 산책의 동선은 1시간 안팎으로 자연스레 맞춰졌는데, 그 정도면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선 '예열'로 딱 적당했다. 그러고나면 밥(이 아니라 빵)맛도 훨씬 좋았다. 이 좋은 산책을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했냐고? 흠, 삶과 여행이 판박이마냥 같다면, 우리가 굳이 여행을 떠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정도면 대답이 됐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