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는 버려지는 것이 없다. 밤하늘의 별은 수명이 다하면 자신을 폭파해 먼지가 된다. 우주는 중력으로 그 먼지를 모아 다시 새로운 별을 탄생시킨다. 무한히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는 우주는 늘 경이롭다.
창백한 푸른 점 어딘가 위치한 이곳에 그 우주를 품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일하는 엄마' 홍윤희씨다. 그녀는 여느 엄마들처럼 분주하다. 밖에서는 일하고, 집에서는 딸 지민이를 돌본다.
그런 그녀를 더 분주하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서울 지하철 환승 시스템이다. 서울 지하철 시스템은 세계 1위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어릴 때 소아암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는 지민이에게 그런 평가는 '껍데기'일 뿐이다.
비장애인이 5분이면 갈아탈 거리를 지민이와 엄마는 40분 넘게 씨름해야 한다. 휠체어리프트 문제로 역무원에게 전화할 때마다 돌아오는 무성의한 답변은 모녀를 더욱 지치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장애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는 협동조합 '무의'를 통해 자원 봉사자들과 '교통약자 지하철 환승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13일 그녀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주말이면 그녀는 딸 지민이를 데리고 자주 밖으로 나가 시간을 보낸다. 대한민국 '일하는 엄마'이기 때문에 딸아이와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은 주말이 유일하다.
"주말마다 바깥으로 나가는 편이에요. 지민이가 집안에만 있으면 갑갑해 해서 집보다 밖에서 지민이와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지민이 데리고 공원도 가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바람도 쐬고 그래요."딸과 외출을 할 때마다 그녀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지하철을 포함해서 버스, 장애인 콜택시, 일반 택시를 이용하는데 그중 지하철을 이용할 때가 제일 힘들다.
"지하철 환승할 때 보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는 경우도 많고, 안내판이 제대로 부착 안 된 곳도 있어요. 다니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부분들 때문에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아요. 역무원들의 태도도 그중 하나고요."서울지하철은 여러 사업체가 운영한다. 지하철 1호선~4호선은 서울메트로에서 운영하고, 지하철 5호선~8호선은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에서 운영한다. 지하철 9호선은 서울시메트로9호선(주)과 서울9호선운영(주)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누군가에겐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구멍이 되고, 누군가에겐 마음의 구멍이 된다.
"2011년에 고속버스터미널 역을 이용하는데 휠체어리프트가 고장이 나 있었어요. 안내문에 '리프트가 고장 났으니 7호선으로 갈아타실 분은 9호선 동작역 -> 4호선 이수역을 이용하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렇게 갈아타면 40분은 더 걸리겠더라고요. 그래서 역무실로 전화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 놀랬어요. '거긴 우리 담당이 아니니깐, 담당 역무실로 전화하라'고 하더라고요."그녀는 이런 문제점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지민이의 그곳에 쉽게 가고 싶다'라는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다.
"안내문만 제대로 붙어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어요. 후원금을 모아서 역마다 휠체어용 안내문을 붙이려고 했어요. 휠체어 눈높이에 안내문만 있어도 좋겠다 싶었죠."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또 다른 장애물에 부딪혔다. 흐르는 물이 큰 바위 앞에서 굽이쳐 나아가듯 그녀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사에 허가받지 않은 안내문을 붙이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런 제약이 없고, 모두가 온라인상에서 볼 수 있는 웹 지도를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그때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간단한 웹페이지를 만드는데도 HTML, CSS, JavaScript 등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녀는 문과 출신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기술적인 부분은 주변 지인들을 찾아가 상황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했어요. 감사하게도 많은 전문가분이 제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담을 해주시고 도움을 주셨어요. 아마 저 혼자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녀는 2016년 5월 본격적으로 계원예대 김남형 교수 그리고 그의 학생들과 함께 지도 제작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제작된 환승 지도는 18개. 지금의 성과가 있기까지 그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다들 바쁜 와중에도 2주에 1번씩 모여 회의를 했어요. 학생들은 지민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휠체어를 이용해 14개의 지하철역을 돌았고, 환승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을 꼼꼼히 기록했어요. 그런 노력이 모여 세상에 없는 지도가 탄생했어요."그러나 서울 지하철의 전체 환승 루트는 수백 개가 넘는다. 18개의 환승 지도로는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그녀는 지하철 환승할 때 변화를 조금씩 실감한다고 말한다.
"최근에 지하철 안내판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휠체어로 환승하면 개찰구를 통과해야 하거나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요. 예전에는 현장 안내판에 이런 내용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난주에 몇몇 지하철역에 가서 보니 그런 '대안 경로'가 표기되어 있더라고요. 앞으로 계속 개선해 나가야죠."
그녀는 지도 작업 제작 중에 종종 내적 갈등에 빠졌다. 한번 시작한 이상 전체 환승 지도를 다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기도 했다.
"처음에 목표를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최종 목표는 전체 환승지도 제작이 아니다'예요.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한 개선점을 현장에 즉각 반영하다 보면 나중에는 지도를 보지 않고도 편안하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 지도가 지하철 관계자들이나 시민들의 변화에 촉매제가 되도록 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생각해요."환승지도 제작을 시작하고, 그녀의 삶은 더욱 바빠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의 행동을 공감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그녀가 최근 SNS를 통해 받은 메시지 일부다.
"저도 선천적 장애가 있어요. 그동안 저는 장애를 혼자 감내하며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보호자와 항상 동행하는데 지하철에서 자주 사람들에게 치이곤 해요. 늘 싸움의 원인이 되는 장소가 지하철이에요. 그 와중에 이렇게 좋은 일 하는 분을 이제야 알았네요. 사람 참 무서워하지만, 용기 내어 감사인사 전해요."그녀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을까. 대한민국 '일하는 엄마'로서 회사 일과 집안일로 정신이 없을 법도 한데, 그녀는 미래 목표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했다.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환승 지도'가 필요 없는 편리한 환승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민이가 엄마 없어도 혼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딸이 장애에 대해 위축되지 않으며, 기본인권인 '이동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해주고 싶어요. 제 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애를 갖고 있거나 소수자분들도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고요."밤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주가 끊임없이 반짝이는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그래도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곳곳에 우주를 닮은 사람들이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행동하기 때문 아닐까.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는 할머니 말에 "내가 안 하면 남도 안 하고, 그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라고 답한 어린 지민이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5월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