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에게 재난현장이란 수없이 많은 유해물질과 위험 상황이 총체적으로 집결된 끔찍한 지옥이다. 죽어가는 사람, 또 그들을 살리려는 소방관의 땀과 눈물이 뒤엉킨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아닐 수 없다.
무섭고 외로운 현장을 지켜야 하는 소방관에게 의지할 것이 있다면 함께 출동한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줄 장비뿐이다.
미국 소방관이 현장에 출동할 때 기본적으로 착용하는 개인보호 장비는 헬멧, 후드, 공기호흡기, 방화복, 장갑, 부츠, 무전기 등으로 구성된다.
소방관이 착용하는 장비의 무게를 모두 합해보면 약 27kg 정도다. 이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평균 몸무게로 소방관들은 현장에서 3학년 아이 한 명을 업고 활동하는 것과 같다.
소방관의 생명을 지켜주는 장비는 그 중요성만큼이나 가격도 비싸다.
소방관 한 명이 착용하는 개인보호 장비를 품목별로 평균가격을 계산해보면 우리 돈 930만 원이나 된다.
하지만 장비가 고가라고 해서 소방관의 안전과 보건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소방관 개인보호 장비는 효율적인 현장활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활동성과 기능성이 담보되어야 하고, 출동한 대원들의 생명과 직결된 제품인 만큼 엄격한 안전기준을 통과한 것이어야만 한다.
현장에 출동한 대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제품성능 기준, 투명하고 깐깐한 성능검사, 그리고 사용자의 섬세한 유지보수와 사용 연한의 준수도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하나라도 소홀하게 되면 소방관의 안전이 크게 위협받을 수 있다.
미국 방화협회(NFPA)는 소방관 개인보호 장비와 관련해 까다로운 기준들을 마련해 놓고 있다.
예를 들면, 방화복(NFPA 1971 기준), 근무복(NFPA 1975 기준), 방열복(NFPA 1976 기준), 산불화재 보호복(NFPA 1977 기준), 생화학 보호복(NFPA 1994 기준), 구급대 보호복(NFPA 1999 기준), 보호복 선택·유지·보수와 관련해서는 NFPA 2113 기준 등이 마련되어 있다.
각각의 기준은 보통 3~5년마다 개정되며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기술위원회(Technical Committee)가 활동하고 있다.
기술위원회에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고 참여한다. 각각의 기준은 소방대원은 물론이고 제조업체 관계자, 대학교수, 보험업체 관계자, 미연방산업안전보건청(OSHA), 국립직업안전보건연구소(NIOSH), 보험업자연구소(Underwriters' Laboratories), 미국시험재료협회(ASTM), 미국섬유화학염색협회(AATCC), 국제표준화기구(ISO) 등의 협업으로 만들어진다.
개인보호 장비가 결코 만능은 아니다. 잘못 관리된 개인보호 장비는 오히려 소방관에게 독이 된다. 미국에서는 몇 해 전 잘못 관리된 방화복을 입고 화재현장에 출동했던 한 소방대원이 진압 활동을 하는 도중 전신 2도의 화상을 입은 사례도 있었다. 방화복을 구성하는 3중 구조 중에서 중간층인 Moisture Barrier가 손상된 것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난현장은 어느 한 명의 영웅이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와는 다르다. 잘 훈련된 소방관, 또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장비가 기본이다.
성능 기준이 허술해 애매모호하거나 혹은 기준이 너무 낮아 전문성이 없는 업체라도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있는 제품으로는 절대 소방관을 보호할 수 없다.
또한,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최저가로 입찰한 업체를 선정하는 조달시스템도 문제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가장 저렴한 장비를 지급할 수는 없는 논리와도 같다.
부디 '안전 국가대표'인 소방관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더 많이 만들어지고 보급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