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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4월 30일)은 재외선거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저도 아이들을 데리고 후쿠오카 영사관에서 투표를 했습니다. 지난해부터 고국에서 벌어진 1700만의 촛불 민심에 함께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투표하러 가기 전부터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 앞을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입니다. 고국에서 투표를 할 때는 시각장애인용 투표보조용구(아래부터는 '보조용구'로 씀)를 사용했습니다. 시각장애인용 투표 보조용구는 일반 투표 용지 크기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판 형태 용구입니다. 이 보조용구에 일반 투표용지를 끼워 시각장애인도 혼자서 기표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복지사가 시각장애인에게 투표보조용구를 이용해 기표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자료사진)
 한 사회복지사가 시각장애인에게 투표보조용구를 이용해 기표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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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관위원회는 이번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시각장애 선거인을 위해서는 기호·정당명·성명을 점자로 표기한 점자형투표보조용구를 모든 투표소에 비치하고 점자와 음성변환 2차원 바코드를 인쇄한 투표안내문 및 음성형 CD 등을 제공한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제18대 대통령선거 재외선거 투표소에는 이런 보조용구가 비치되지 않아 시각장애가 있는 저는 불편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투표를 앞두고 며칠 전 제가 살고 있는 후쿠오카 영사관에 문의를 했었습니다. 혹시 이번 선거에서는 보조용구가 비치되어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이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재외선거 투표소에는 장애인용 투표보조용구가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영사관 공무원은 가족이나 친지 등 투표를 도와줄 사람을 데리고 오라는 안내를 했습니다. 제가 "비밀선거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위반 아니냐?"고 묻자 뭐 대강 얼버무리고 말더군요.

중앙선관위원회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투표보조용구를 국내에선 모든 투표소에 비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 204개에 이르는 재외선거 투표소에는 장애인 투표보조용구를 비치하지 않았습니다. 선관위 관계자에게 그 이유를 묻자 예산상 그런 것 같다는 황당한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국내 1만3천여개에 이르는 투표소에 비하면 200여 개의 재외선거 투표소는 그리 많은 예산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예산 문제가 아니라 세밀히 신경을 쓰지 못한 결과라고 추측됩니다.

일본은 기표를 할 때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기입합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이 투표를 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일본의 시각장애인 지인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 투표소에서는 기표소 안에 각 후보자의 이름이 벽에 붙어 있다고 합니다. 그 명단을 보고 한자나 일본 가나로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기입하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은 명단을 확인하기도 어렵고 이름을 직접 펜으로 쓰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죠.

그래서 일본의 투표소에는 점자로 된 후보자의 명단과, 점자를 쓸 수 있도록 점필과 점판과 같은 점자 필기도구를 모든 투표소에 비치한다고 합니다. 또 점자를 모르는 중도실명자들을 위해서는 대필자를 데리고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에 일본인 활동보조인을 데리고 대신 기표를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투표보조용구는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준비 미비로 상처 받거나 사실상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보다 꼼꼼히 준비를 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습니다.


태그:#대선, #시각장애인, #재외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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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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