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7일 새벽, 강남 한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게 살인의 이유였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이 애석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 찼고, 추모의 글과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구들이 적힌 포스트잇이 나붙었습니다. 그 후 1년, 2017년의 대한민국은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1주기를 맞아 이 사건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봅니다. [편집자말] |
"네가 굳이 왜?" "내 일이니까. 네 일이고, 우리의 일이니까.""솔직히 나는 남의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 보면... 대단하기도 한데 좀 한심해. 오지랖이잖아 결국."내가 페미니즘을 막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페미니즘은 곧 우리의 이야기임을 말할 때에도 나는 '페미니스트'로 보이려고 했다. '메갈'이 아니라. 이를 증명하기 위해 언제나 페미니즘은 곧 모든 성의 상생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페미니즘이 해소시켜줄 남성의 문제로부터 출발해 마지막은 여성 문제를 '끼워 파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 당시 내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은 맨박스(남자를 둘러싼 고정관념)였을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왜 그러한, '페미니스트로'서의 생존 방식을 취해야 했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와 달라.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항상 메갈인 것은 아니라고' 들리지 않는 시위를 하며 나의 생각을 전달해야만 했다. 내가 '메갈'이 된다면, 그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혹은 날 떠나갈 테니까. 나아가서는 날 증오할 테니까.
나 역시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미움 받는 게 두려웠다
큼지막한 사건들은 으레 엊그제 일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졸업을 앞둔 내가, 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엊그제처럼 느껴지듯이.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날의 사건만은 참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이제야 1주기라니, 몇 년은 더 된 일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유독 내게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일상의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만, 사건 이후 '여성'으로서의 내 시간은 물결에 온전히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여성으로서의 지난 1년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언제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남의 관심을 사는 것, 시선을 받는 것이 두려웠다.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bell jar[The bell jar(1963), 여성을 '종 모양 유리 덮개에 가두는' 사회적 행태에 문제제기 하는 Sylvia Plath의 소설]에 갇힌 인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명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정말이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소리 질렀던 것은 학교 수업에서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강사를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나는 강사의 말이 정말로 성차별적이었는지, 내가 과하게 예민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했다. 그래서 익명으로 학교 게시판에 글을 썼다. 그때 내 말을 듣고 함께 분노해준 다수, 일반이 있었기에 교내 신고센터를 찾아갈 수 있었고, 정당한 단계를 거쳐 강사로부터 사과를 받았고 해당 강의에서의 강사 해임이라는 결과를 냈다.
이는 내가 자기검열에 빠져 있을 때, 교내의 '대중'이 나에게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내가 다르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강남역 사건 이후로, 변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선택, 틀리지 않았다
말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갓 태어난 아기였다.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학교에 최순실 게이트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써 붙였고, 국민이자 여성으로서 광화문에 나가 'miss.박 이라고 부르지 마!'를 외쳤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이 왜 세상에 필요한 것인지를 말했다.
이러한 과정은 내 생활양식 자체도 바꿨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쉽게 살해당할 수 있는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더 쉽게 살해당할 수 있는 비인간 동물을 아무런 가책없이 살해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느꼈다. 그래서 비건의 삶을 택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그들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내가 가진 두려움 때문이고, 이기적인 인간 특성의 발로라면, 그렇다.
그렇지만 사실, 나의 변화는 예정된 것이었다.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느리지만 조금씩은 변했을 것이다. 다만 그 사건에서 내가 '우연히' 살아남았음을 발견했기에, 살아남기 위해 전보다 강력한 생존 전략을 필요로 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사실, 세상의 변화는 예정된 것이었다. 여성혐오 범죄는 너무나 쉽게 자주 일어났지만, 이를 사회의 문제로 치환할 분명한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기에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고귀한 희생'이라든지 '세상을 바꿀 trigger(방아쇠, 계기)가 돼줘서 고맙다'는 말은 정말로 하고 싶지 않다. 나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는 분명 예정돼 있었다. 단지 함께, 조금 더 빠르게 나아갈 계기가 됐던 것뿐이며, 그날의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일상을 감싼 모든 일들이 계기가 되어 변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 모든 문제들을 개인의 것으로 치환하는 관점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공기처럼 감싼 사회적 문제이며 '나'의 문제임을 안다.
따라서 우리가 목소리를 내기로 한 이유는 단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다. '신체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여성이 '미친놈'의 표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다시,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된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서로에게 말해주며 갓 태어난 아기가 된다. 2017년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