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숫자가 같다.
지난 '9'년 동안,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5.18민주화운동(아래 5.18)의 위상을 끝없이 망가뜨려 왔다. 그리고 취임 '9'일 만에,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8일과 마주하게 됐다. 문 대통령은 5.18의 위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그의 출발은 힘찼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정교과서 폐지와 함께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라는 업무지시를 내렸다. 제2호 업무지시였다. 1호 업무지시는 일자리위원회 구성이었는데,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일자리 대통령'을 캐치프레이즈로 자주 사용했었다. 즉 이처럼 공을 들인 일자리 분야를 제외하면, 최우선 업무지시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선택한 것이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 수석은 12일 문 대통령의 2호 업무지시 내용을 발표하며 "정부는 기념일로 지정된 5.18과 그 정신이 더 이상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5.18, 헌법에 담긴다면... 독재-민주화 대립 구도 청산"
임을 위한 행진곡은 2009년(이명박 전 대통령 2년 차)부터 5.18 기념식에서 제창이 금지돼 매년 논란이 돼왔다. 중간에 방아타령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신하려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특히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은 처장 자리에 오른 2011년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폄하 등 5.18 배척의 최전선에 있어왔다.
2호 업무지시가 있기 전날인 11일, 문 대통령은 문제가 많았던 박 전 처장의 사표를 즉각 수리했다. 당초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장관을 비롯한 정무직 일괄 사퇴를 건의했는데, 문 대통령은 내각의 대표 격인 황 총리와 박 처장의 사표만 받아들였다. 사실상 문 대통령의 1순위 해임 공직자는 박 전 처장이었던 셈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5.18 기념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3년 이후 한 번도 5.18 기념식을 찾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18일(공식 선거운동 둘째 날) 광주 충장로를 찾아 "한 달 뒤 5.18 기념식에서 제19대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하겠다. (기념식에서) 목청껏 우리의 노래, 광장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 함께 부를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현장에 모인 지지자들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기도 했다.
한편 문 대통령의 5.18 관련 공약은 선거 기간 동안 호평을 받았다. 특히 그가 지난 3월 20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약속한 '5.18 정신 헌법전문 수록'은 역대 대통령 후보로서는 최초로 내놓는 공약이었다.
5.18 기록관의 유경남 학예연구사는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근본이자, 출발점이다"라며 "(5.18 정신이 헌법전문에 수록된다면) 이미 헌법에 명시돼 있는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4.19혁명과 함께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든 사건으로 5.18을 공식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공약이 실현된다면,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권 이후 소위 독재와 민주화운동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며 "민주화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고, 우리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가치로 공식화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5.18 관련 공약에 힘을 보탠 강기정 전 의원(문재인 후보 선대위 총괄수석부본부장)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독일은 1945년 나치가 망한 뒤 지금까지 나치 잔재를 청산하고, 생활 속에서 나치의 문제를 교육하는 등 새로운 독일 건설과 민주주의를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아직도 나치 청산이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5.18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5.18이냐'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뿌리인 5.18의 정신을 꼭 헌법 전문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5.18의 전국화·세계화 등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고, '아직도 5.18이냐'는 말도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다."이어 강 전 의원은 "지난해 5월, 문 대통령, 안희정 충남지사, 김경수 의원과 함께 국립 5.18민주묘지(신묘역)를 참배하고, 이어 망월묘지(구묘역)까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라며 "망월묘지는 1980년 5월 27일 목숨을 잃은 광주시민들이 쓰레기차에 실려 와 매장된 곳이다. 문 대통령은 단순히 참배를 떠나 5.18 정신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문 대통령은 ▲ 옛 교도소 부지에 민주·인권·평화복합공간 조성 ▲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공식 기념곡 지정 ▲ 국가 차원의 5.18 진상규명위원회 구성(발포명령자, 헬기기총소사 책임자 처벌 등) ▲ 법 개정 통한 5.18 정신 훼손 시도 엄벌(5.18 관련 자료 폐기금지 특별법 제정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앞길이 탄탄한 것만은 아니다. 문 대통령의 5.18 관련 공약들은 이른바 보수정당의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특히 문 대통령은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개헌 국민투표를 계획하고 있는데, 그 사이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은 정국을 달구는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1년여 만에 반대 세력을 설득해 개헌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색깔론 없는 바른 세상 만들어졌으면"5.18 피해자들은 새 정부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5.18 당시 고등학생 아들을 잃은 문건양(83)씨는 "참 바람직하게 흘러가고 있어서 기대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문씨는 '5.18 정신 헌법전문 수록' 공약을 묻는 말에 "속으로 '이 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이렇게 고생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라며 "문 대통령이 누구도 다시는 색깔론을 꺼내지 않게끔 바른 세상을 만들었어면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문씨는 "지금 5.18 어머니, 아버지들이 고생하는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라며 옛 전남도청의 원형보존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5.18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옛 전남도청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민주평화교류원으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시민군 상황실·방송실 등이 원형이 훼손됐다"며 250일 넘게 그곳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문씨의 아들 문재학군은 5.18 당시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5.18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던 김향득(55)씨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게 하고, 박승춘 같은 사람에게 사표를 내게 한 것은 정권이 바뀌었음을 느끼게 해준다"라며 "문 대통령 자체가 권위주의적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계속 그런 정치를 해줬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2013년 옛 전남도청 별관 일부가 철거된 것을 거론하며 "도대체 그때 왜 옛 전남도청 일부가 철거됐는지 모두가 궁금해한다"라며 "당시 책임선상에 있던 공무원들은 지금이라도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