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생긴 날, 훌쩍 나가고 싶은데 꾸미고 다니기는 싫고…. 그렇다고 어디에 쭉 있기보다는 잠깐의 기분 전환이 필요한 날, 딱 그런 날엔 빵을 사러 돌아다녀 보는 건 어떨까?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듯 베이커리도 개성 넘치는 곳이 많아져, 다니는 재미가 있다. 심지어 식당처럼 혼자 들어가는 걱정 따위도 필요 없고, 그 자리에서 뭘 꼭 먹을 필요도 없다. 그저 부담 없이 출발해 보자.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마포구의 중심가에서 한걸음 들어간 주택가. 아파트단지가 숲을 이룬 동네에 차분한 분위기의 한 빵집이 있다. '빵'이라고 써진 옆간판도 검은 글씨에 체크무늬 흰 바탕.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화이트 톤의 심플한 인테리어, 흔한 장식도 거의 없고 각종 설명을 적은 종이들만 벽에 붙어 소박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은 좀처럼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아, 건강하다
벽에 붙어 있는 건 주로 천연발효종과 우리밀빵에 대한 내용. 여느 빵집에서나 볼 수 있지만 디테일은 조금 다르다. 무조건적으로 우리밀이 좋다, 맛있다는 광고가 아닌 빵에 들어가는 밀의 특징과 그 빵의 단점까지도 비교적 상세하게 적어놔 '정직하게 만드시는구나'라는 인상을 준다.
우리밀로 만든 빵은 내가 아는 범위에선 기본적으로 외국밀로 만든 빵보다 빠르게 마르고 식감도 훨씬 거칠기 마련이다. 장점은 거의 건강에 관한 것들 정도. 이 빵집은 바로 그 우리밀로 빵을 만드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빵 하면 떠오르는 건 단팥빵, 소보로빵, 도넛 같은 설탕이 많이 들어간 단과자 빵들이라 세간의 인식에서는 건강에 좋지 않게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거의 과자 대용품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유독 아기를 데리고 오는 아주머니가 많은 이곳에서는 조금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는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빵이나 케이크를 권하고, 운동하시는 분이 한가득 빵을 사가시는 모습은 여느 빵집에서는 여간해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당뇨가 있으신 분까지 찾을 정도라니 언젠가 사장님께서 농담 삼아 '이러다가 건강 쪽으로만 이미지가 굳을까' 걱정하신 것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한 가지 일화로, 지금은 팥 수급 문제로 잠시 생산이 중단된 이곳의 단팥빵은 이름이 할머니 팥빵인데, 처음엔 설탕을 넣지 않았다가 하루를 못 버티고 팥이 상해 버리는 바람에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설탕을 넣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 팥앙금에선 할머니가 쑤어 주신 듯한 팥의 맛, 단맛이 없는 팥 본연의 맛이 잘 살아 있는데, 이게 원래 이런 맛이구나 하고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놀랐던 적도 있다. 개인적으론 건강하다는 말을 빵에 붙이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구나 싶기도 했었고.
알토브레드의 빵은 거의가 식사 빵인데, 속재료를 다양하게 채워 넣은 통밀, 호밀 빵이나 건강한 느낌의 포카치아, 치아바타들 그리고 식빵이나 스콘, 아기들이 먹을 간식용 빵도 소소하게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쌀 케이크를 몇 종류 하시는데 아무래도 건강한 매력을 가진 케이크들이라 먹기에 부담이 덜한 편이다. 물론 케이크인 만큼 달콤한 맛은 제법 있다.
몇 가지의 빵을 고르고,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사소한 안부 몇 마디 나누고 밖으로 나설 때면 처음 이 빵집을 알게 됐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막연히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으로 볼 때는 속재료가 꽉 들어차 맛이 강해 보이는 빵 정도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 첫 방문 때엔 이런 담백한 스타일의 빵을 파는 빵집인 줄 전혀 몰랐었다.
모델을 연상시키는 훤칠한 키와 외모를 가진 남자 쉐프님 그리고 도시적인 첫인상을 가진 여자 쉐프님 부부를 처음 뵐 때만 해도 젊으신 분이 만드는 빵집인 만큼 트렌디한 빵들로 채워져 있을 거라고 여겼달까. 다행히도 그 예상은 빗나갔고 그 덕에 오히려 꾸준히 가게 되는 빵집이 돼 버렸다.
먹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빵
두 쉐프님은 정이 있고, 제품 사진 하나 멋들어지게 찍어 광고하는 것조차 어색해 하시는 나름의 반전 있는 모습도 있었는데, 남자 쉐프님의 소소한 최근의 취미는 가게 한 켠 자그마한 제분기로 밀을 제분하며 스트레스를 날리는 거라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빵 말고 다른 쪽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시는 게 제빵일이 천직이신 분의 아우라가 확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빵들은 참 수수한 매력을 가졌는데, 건강한 맛을 넘어 깨끗할 정도로 딱 우리밀과 속에 들어간 재료 자체의 풍미만이 그대로 전해지는 맛을 가지고 있고, 식감 또한 우리밀의 거친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사람에 따라선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만드시는 분이 정말로 먹는 사람을 생각해 먹거리를 만드는 배려, 그 세심함이 이 빵에는 녹아들어가 있다. 산책의 대신쯤 되는 여정, 거기서 이런 작은 온기를 느끼고 올 수 있는 것 또한 빵을 사러 다니는 즐거움 중 하나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사온 빵에 대해 몇 마디를 적어보려고 한다. 처음은 단호박크림치즈깨통밀. 알토브레드의 시그니처 같은 빵이다. 아무래도 속이 이렇게 꽉 차 있으면 끌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인지라 가장 인기가 많다.
이 빵은 통밀 빵 속에 삶은 단호박과 크림치즈 그리고 호두를 두툼하게 채우고 겉과 속에 깨를 듬뿍 발라 마무리한 것. 기본적으로 단호박 자체의 구수하면서 은은한 단맛 그리고 크림치즈의 살짝 새콤한 맛이 아주 풍부한데, 호두의 고소함도 중간 중간 더해지고 깨가 씹히는 것도 포인트다.
빵피 자체는 살짝 거칠고 차진 질감이 있는 편. 속재료가 많은 빵에서는 빵피 자체의 맛을 강하게 알아채기는 힘들지만 통밀 빵이라 비교적 그 구수한 맛이 은은하게 깔려 있다. 참깨와 검은깨를 같이 사용하고, 밀도 앉은뱅이 통밀을 쓴다.
그리고 단호박에도 신경을 많이 기울이시는데, 첨가제 없는 순수한 제주 밤호박만으로 단맛을 내다 보니 삶았을 때 단맛이 원하는 만큼 안 나 못쓰는 것이 참 많을 정도라고.. 보통 건강빵을 처음 먹는 분들이 요런 속재료가 듬뿍 들어 있는 빵들로 입문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빵은 거기에다가 덜 자극적이고 '정말로' 건강하기까지 하니 제격이 아닐까 싶다.
다음은 베리굿호밀. 호밀의 구수하면서 시큼한 향이 먼저 후각을 자극하는 빵으로, 우리밀과 우리호밀로 만들어졌고, 속에는 호두와 크랜베리, 블루베리, 블랙커런츠의 베리류가 들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아 베리굿이 이런 의미야' 하고 피식 웃게 되는 재미가 있다.
호밀빵 계열이니만큼 거칠고 무게감이 있는 빵인데, 속은 촉촉하고, 차지게 씹힌다. 맛은 굉장히 담백, 구수하고 호밀 특유의 시큼한 맛도 끝에 살짝 스친다. 거기에 각종 베리류의 상큼하고 은은한 단맛이 더해지고, 호두의 고소한 맛도 있어 심심함 없이 다양한 맛을 즐길 수가 있다. 덜 자극적이라 식사용으로도 어울리는데, 무게감이 있는 빵이니만큼 포만감이 풍부하고, 무거움에도 먹고 나면 속에 얹히는 게 없어 뒷맛이 참 깔끔하게 떨어진다.
마지막에 먹은 건 바질치즈샌드위치. 치아바타(버터가 들어가지 않은 이탈리아 식사빵) 사이에 블랙 올리브, 바질페스토, 치즈가 들어가 있다. 가벼운 식사로 딱 좋은데, 빵 자체도 폭신하니 가볍고, 속에 들은 재료도 무겁지 않은 맛이다. 표면은 까슬하지만 속은 폭신, 촉촉한 식감의 빵을 베어 물면 담백한 빵맛과 함께 바질페스토 특유의 허브 향과 간간한 맛이 올리브오일에 섞여 입 안에 쫙 스며든다.
치즈의 적당한 짭짤함과 고소함도 더불어 입을 채워주고, 중간 중간 씹히는 올리브까지 있어 간단한 구성과 다르게 맛은 제법 심심하지 않아 자꾸 집어먹게 되는 빵이다. 부담 없이 먹고 싶을 때 딱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른달까.
운동, 몸짱, 다이어트, 건강 같은 웰빙 트렌드가 터진 지도 벌써 한참, 이런 소재로 나오는 제품들은 넘치고 넘친다. 빵도 마찬가지일 테고. 하지만 그런 곳들 중 '진짜' 건강을 신경 써서 만드는 곳이 얼마나 될까? 원하는 품질의 팥을 구할 수 없어 가장 인기 있는 팥이 들어간 빵을 생산 중단한 빵집. 소비자와 생산자라는 경제적 관점으로만 판단하면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요즘에야 여기가 책에도 소개되고, 방송에도 살짝 나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쉐프님 부부는 유명세를 치르길 싫어하시고, 그저 동네 빵집으로 쭉 남고 싶다라고 하셨다. 어쩌면 빵에도 이런 모습이 녹아들은 걸까? 그런 소박한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가게의 한쪽 구석엔 아기들이 적어 놓은 낙서들을 붙인 나무판이 눈에 띈다. 아기 손님이 참 많은 빵집, 그 아기들에게 이유식 대용으로 먹어도 괜찮은 빵을 파는 가게. 그렇게 동네 분들의 손때가 묻어 세월을 쌓아가는 빵집. 알토브레드를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하자면 딱 그 모습을 떠올리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29일의 사진입니다. 인기가 있는 빵은 전화 등으로 미리 예약하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카운터에 빵 맛있게 먹는 법이 적힌 종이도 건강빵이 처음이시면 가져가시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