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사. 문장 문장마다 박수치지 않을 수 없었고 끝났을 땐 벌떡 일어나 박수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부행사에서 자주 접하는 의례적인 기념사가 아니라 시대정신과 철학, 그리고 의지와 당부 말씀까지 생생하게 담긴 역사적 연설입니다. 5.18을 기념하는 기념사인데 기념사 자체가 길이 기념할만 했습니다. 일독을 강추합니다!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십시오."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말 그대로였다. 제37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는 역사적 연설이라 하기에 충분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오늘 5.18 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5.18묘역에 서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 대통령의 기념사는 진정성과 결연함이 깊이 묻어있었다. 문장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감정이 복받친 듯 연신 눈가를 훔쳤다.
문장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 고심한 흔적이 역력그럴 만도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위상이 한없이 추락했던 5.18 기념식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에만 기념식에 참석했을 뿐, 다음해부터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임을 위한 행진곡> 역시 제 대접을 받지 못했다. 5.18에 대한 도를 넘는 왜곡과 폄훼에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의구심까지 받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와는 확연히 달랐다. 취임 이후 9일 만에 열린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은 5.18정신과 광주 정신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참된 모습이라고 웅변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폄훼에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과 책임을 밝혀내고,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담을 수 있도록 국회의 협력과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헌신한 열사 4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가 하면, 더 이상의 불필요한 논란이 종식되길 바란다면서 5.18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시민들과 함께 힘껏 제창했다. 뿐만 아니라 문 대통령은 광주정신이 촛불정신으로 승화된 것처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5.18을 대하는 문재인의 자세
시작부터가 남달랐던 기념식이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일반 시민들과 함께 '민주의 문'을 지나 기념식장으로 입장했다. 이전 대통령들이 경호상의 문제로 차량을 이용해 기념식장으로 들어갔었던 데 반해 문 대통령은 등장부터 격식을 허무는 파격을 선보였다.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의 추도사를 듣던 도중 문 대통령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기념식이 끝난 뒤에는 '모세의 기적'이 연출됐다. 참배를 마치고 민주묘지를 빠져나가던 문 대통령을 태운 차량과 경호 차량들이 119구급차의 긴박한 사이렌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우측으로 비켜 섰다. 기념식에 참석했다 쓰러진 시민을 태운 119구급차는 그 덕분에 신속하게 민주묘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으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열린 경호의 진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문 대통령은 기념식을 마친 뒤 광주에서 가진 점심식사 장소까지도 미리 꼼꼼하게 챙겼던 것으로 확인됐다. 전날 문 대통령 측은 광주민주화운동 피해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을 수소문했고 그중 한 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 역시 시사하는 바가 남다른 장면 중의 하나다. 문 대통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이 소소한 장면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이날 기념식을 더욱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만든 장면은 따로 있었다. 김소형씨의 추도사 이후 문 대통령이 보여준 행동이 바로 그랬다. 추도사 도중 눈물을 훔치던 문 대통령은 추도사가 끝나고 퇴장하는 김씨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안아줬다. 이 장면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며 더욱 화제가 됐다.
세월호 유족을 대했던 박근혜의 자세
이 장면을 보고 있자니 몇 해 전 국회에서 벌어졌던 풍경을 떠오른다. 2014년 10월 29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았을 때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국회 본청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월호 유족들의 애타는 외침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지근거리에서 "살려달라"과 외치던 유족들의 호소를 외면한 채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갔다. 경찰 통제선과 국회 의경들에 가로막혀 있던 유족들의 눈물과 절규만이 안타깝게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인격과 품성은 그 사람의 행동과 말 속에 오롯이 녹아있다. 언제나 공감 능력의 부재를 지적 받아온 박 전 대통령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근한 예다. 유족들에게 박 전 대통령은 서릿발처럼 차갑고 매정한 지도자였다. 압도적 참사에 망연자실해 있던 유족들 앞에서 그는 언제나 무표정했고 초연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그는 유족들을 대했다.
문 대통령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취임 이후 문 대통령이 보여준 일련의 행보들은 그가 따뜻한 감성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지도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는 시민들과 거리낌없이 만나고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에게도 경어체를 쓰는가 하면,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서슴없이 경호선을 넘는다. 시민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울며, 상처를 끌어안고 위로해 준다.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낸 이웃같은, 친근함과 따뜻함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시민들이 지도자에게 기대했던 바로 그 모습이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들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시대적 과제인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 검찰개혁·재벌개혁·사회적 양극화·비정규직 문제·청년실업 등 산적해 있는 과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우리가 타인의 아픔과 슬픔, 고통과 상처에 대해 공감 능력을 가진 지도자를 만나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2012년 당시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권에 도전했다. 우리 사회를 관통해 왔던 이념, 사상, 권력, 성공, 출신, 계층, 성별, 학력, 지역보다 사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약자를 배려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지 이제 열흘, 사람사는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대통령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