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8일 37주년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자들은 광주 민중항쟁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9년 만에 공식적으로 제창했습니다. 올바른 역사인식의 회복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이명박 정부 때부터 왜곡되고 폄훼되었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위상 바로세우기와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부상자들에 대한 진정한 위로와 상처 치유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잔혹한 국가폭력을 행사했던 전두환, 노태우 정부가 물러난 후 90년대 민주정부 하에서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지속되었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민중항쟁의 진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졌고, 여러 가지 한계는 있었으나 폭력을 행사한 주범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남아 있으며, 당시 시민들이 입은 깊은 상처는 3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들까지 아우르는 온 국민에게 5.18 광주 민중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자신을 희생하며 호소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기반이 되었던 책, 1980년 오월의 광주를 기록했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개정판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온갖 어려움 끝에 1985년 출간되었으나 정부에 의해 금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지의 표지 상태로 시중에 배포되고 입소문으로만 몰래 판매되었는데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입니다.
광주 민주항쟁의 고전, 촛불 시민에게 다시 오다
이 책이 32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2017년의 촛불시민에게 찾아왔습니다. 저자 중 한 명인 이재의 님이 책의 말미에 쓴 짧은 글에 이 책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난관을 뚫고 초판이 세상에 나왔는지를 알게 되니 더 숙연해집니다. 이재의 님이 밝히는 이번 개정판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넘어넘어> 초판이 피해자인 광주시민의 증언과 기록만을 토대로 집필된 데 반해, 개정판은 그 이후 밝혀진 '계엄군의 군사작전' 내용과 5.18 재판 결과를 반영하여 '역사적/법률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5.18을 현장에서 목격한 내외신 기자들의 객관적인 증언도 실었다. <넘어넘어> 초판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인식과 정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개정판에서는 초판과 달리 증언자들의 실명을 밝혔다. 다만 계엄군 관계자 가운데 하급 지휘관(대위, 중대장 이하)이나, 사병들의 경우 익명으로 처리하였다. 법률적으로 처벌받지 않았어도 현장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한 책임이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대대장들의 이름은 실명으로 밝혔다."(584쪽)지난 두 번의 정부가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지독히도 훼손하고 싶어했던 5.18의 민주적 가치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또한, 저자 황석영 님이 쓴 것처럼 옛 권위주의 체제의 기득권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던 '타협적 민주화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도 1980년 광주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촛불 혁명을 이뤄가고 있는 우리는 진실한 5.18의 기록을 고통스럽지만 다시 한번 마주하며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 책을 '지금까지 나온 광주항쟁에 관한 여러 기록 가운데 가장 세밀하고 고전적인 저술'이라 평가합니다. 그는 '광주의 비극이 서울과 워싱턴 두 나라 정치권력의 합동작품이었다'는 점을 고통스럽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이 한국의 군사독재자들을 수십 년간 지원한 결과로 광주항쟁이 빚어졌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민주의 가치를 피로서 지켜온 대한민국 국민에 경의를 표합니다.
왜 광주였는가?1980년 광주의 비극에 도화선이 된 사건은 이전 해 유신독재에 항거해 일어났던 '부마항쟁'과 이후 이어진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이었습니다. 책의 시작 부분엔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 이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부상 배경과 과정, 그리고 5월 민중항쟁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사건들이 압축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당시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에 비해 이 열기를 담아낼 만큼 준비되지 못했던 민주운동 진영과 조직적이고 공격적으로 권력 찬탈을 준비했던 신군부의 모습이 대조되어 안타까웠습니다.
5월 13~14일 전국의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입니다. 당시 군부는 '북한의 적극적인 대남활동 및 비정규전 위협이 예산된다'는 이유를 대며 소요 진압을 위해 군대 동원을 준비합니다. 치열해지던 학생시위 속에 서울에선 총학생회 대표들이 격론 끝에 시국 추이를 관망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시위를 중단하기로 합니다. 일명 '서울역 회군'을 결정합니다.
이와는 달리 광주에선 5월 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횃불시위'로 민주화대성회가 개최됩니다. 광주/전남 지역의 반응을 주시하던 신군부는 군대를 배치해 학생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이 연행됨에 따라 총학생회 지도부는 힘을 잃게 되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저항의 불길은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5월 18일 시위 학생들이 공수부대와 대치하다 공수대원들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폭력을 가한 것이 항쟁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공수부대에 의해 고등학생들까지도 잔혹하게 희생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광주 시민들은 전부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시민들의 저항이 점점 더 거세지자 군인들의 폭력도 더욱 강력해졌고 결국 고교생 한 명이 총에 맞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같은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이때에도 언론은 민중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평소처럼 연속극이나 오락 프로그램만 방영되고 있었다. 나라의 한편에서는 '집단적인 인간사냥'이 벌어지는데, 텔레비전에서는 다리를 흔들어대며 춤을 추는 출연자의 모습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배신감과 타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다음날 시위대가 문화방송국을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120쪽)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라 매도하는 진압군을 향해 더욱 분노했습니다. 당시 금남로에는 어린 꼬마 손을 잡은 할머니부터, 학생, 회사원, 주부 등 모든 계층 수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20일 저녁 시간엔 대규모 차량시위가 조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저자들은 이 때를 '민중 스스로 역사의 전면에 자신의 온 생애를 던졌던 항쟁의 정점'이라고 평가합니다.
극단적으로 대치되던 전투는 결국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발포까지 하게 되면서 잔인한 학살로 이어집니다. 당시 헬기에서도 총을 쐈다고 하니 군인들은 시민들을 적 혹은 폭도로 여긴 것이 틀림 없어 보입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시위대도 예비군 무기고 또는 광주 주변 지역의 경찰서 등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진압군에 맞서게 될 정도로 상황은 악화됩니다.
"흑백 이념으로 세뇌된 병사들은 광주시민의 저항을 '용공부낮들의 준동'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섬멸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광주시민은 '국민'의 구성원이 아니라 '적'이 됐고, 병사들은 양심의 거리낌 없이 그들을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249쪽)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계엄군은 잠시 물러나고 시민들은 약 6일 동안의 해방기간을 맞이합니다. 저자들은 이 기간을 "'특정 집단이나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민중의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돼 억압체제를 무너뜨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도청 앞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분수대 위로 올라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정한 형식이나 제약도 없이,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순전히 자연발생적으로 궐기대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나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개인적인 체험을 말했지만 시민들은 이를 통해 서로를 공감하고 일체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해방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은 계엄군과 여러차례 협상을 하게 되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또한 신군부 입장에선 광주에서의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대될 경우 안정적으로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에 쉽게 협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계엄군은 25일 광주를 '소탕'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27일 공수부대에 의한 잔혹한 도청진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광주 민중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선 현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남겨진 과제를 말해줍니다. 당시 희생되어 암매장된 70여 명의 사람들이 37년이 지난 현재에도 행방불명자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사체를 직접 묻었던 군인들의 자기고백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책에 따르면, 1988년 광주 국회청문회를 통해 광주 학살의 진상이 국민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항쟁의 진실은 규명되지 못하고 학살 책임자들의 반성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같은 해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는 전두환, 노태우 등 고위지휘관 9명을 5.18책임자로 고소, 1994년 시민사회단체가 5.18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 포함 35명을 고발하였으나 각각 무혐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어 공소권 없음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각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1997년 12.12쿠데타와 5.18학살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대법원은 12.12쿠데타를 군사반란으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신군부의 진압을 내란으로 판정'했습니다. 하지만 학살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장지휘관들은 전혀 처벌되지 않았고, 책임자들이 법정에서 남발한 위증들에 대해서도 추궁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철저하지 못한 책임자 처벌은 역사적 진실 왜곡과 항쟁 과정에 대한 거짓 주장들이 난무하게 했습니다. 행방불명자 확인, 발포책임자, 현장지휘관에 대한 처벌, 희생자들에 대한 온전한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 5.18의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이들에 대한 처벌 등 대한민국에 남겨진 과제들이 새 정부에서는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