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평론가 김태훈씨는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대담을 엮어 쓴 책 <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에서 김 의원을 '경계인'이라고 표현했다. 한국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영남과 호남, 중앙과 지방이라는 대립된 가치 사이에 서 있는 김 의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양 극단의 차이를 좁히는 '중제자'를 자임해 왔다. 그리고 이제 '지방분권'이라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과제 수행에 열쇠를 쥐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30일 김 의원을 행정자치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문 대통령은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김 후보자는 새 정부의 핵심 국정목표인 지방분권, 균형발전, 국민통합의 목표를 실현할 적임자로 판단했다"라고 지명 배경을 설명했다. 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때로 기득권 포기하면서까지 지역주의 타파와 국민통합에 헌신했다"라며 "특히 분권 자치에 대해서는 한국 최고의 전문가"라고 평가했다.
비주류의 길, '지역주의 타파'로 극복197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김 후보자는 1977년 유신반대 시위로 처음 구속됐고,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또다시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졸업 후에는 민주통일재야운동연합,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등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며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다.
김 후보자는 1988년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한 뒤 1991년 3당합당에 반대한 세력이 남은 '꼬마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변인으로 있던 민주당에서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92년 11월에는 '이선실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세 번째 구속을 당했고 이듬해 2월 석방됐다.
이후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복귀하면서 1995년 새천년민주당과 민주당으로 분당됐다. 민주당에 남은 의원들은 민주화와 당 쇄신, 지역주의 극복,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청산 등을 내건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했다. 여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김원기 전 국회의장, 제정구 전 의원, 유인태 전 의원 등이 주축이 됐고 김 후보자는 막내 격이었다.
통추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갈라졌다. 제정구 의원을 비롯해 김 후보자 등은 당시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김 후보자는 소장 개혁파로 활동하며 2000년 경기 군포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당 개혁에 실패한 김 후보자는 2003년 이우재, 이부영, 김영춘, 안영근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다. 이후 같은 지역에서 17대, 18대 국회의원에 내리 당선됐다.
3선의 중진 의원이 되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서 비주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2012년 당 최고위원에 선출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군포를 떠나 야권의 불모지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뒤이어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대구시장으로 출마했지만 또 다시 고배를 마셨다.
세 번째 도전 끝에 2016년 대구 수성갑 20대 총선에서 당시 새누리당의 대선주자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꺾고 당선됐다. 야권의 불모지였던 대구에서 당선되면서 김 후보자는 일약 민주당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조기대선 국면에서 경선 돌입 직전에 불출마를 선언했고, 이후 문재인 후보가 확정되자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대구경북 지역 공략을 책임졌다.
김 후보자는 행자부장관으로 지방분권을 위한 활동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소수정당과 보수정당, 여당과 야당 등 다양한 위치에서 정치활동을 해 온 만큼 각 주체의 이해관계가 충돌 할 수 있는 행정자치 업무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 받는다. 또 정부의 핵심 개혁과제를 실행하면서 여권 유력주자로서 김 후보자의 정치 보폭도 더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