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오히려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동성커플들이다. 이성커플들이 결혼이라는 제도의 굴레를 피하거나 늦추며 다른 방식의 삶을 설계하는 동안, 동성커플들은 그 굴레 안에 들어가겠다고 싸운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낡고 불편해져 온갖 유인책을 써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결혼이란 제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생에 한 번쯤 가질 '가능성'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 된다. 불평등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꽤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깊은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결혼이 뭐길래작년 2016년 5월, 동성커플인 김조광수 감독과 김승환 대표가 혼인신고를 수리해 달라고 법원에 제기한 신청이 각하되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에 대해 "청구인들의 바람은 문명의 가장 오래된 제도 중 하나로부터 배제된 채 외로운 삶으로 추방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들은 법 앞에 평등한 존엄을 구하고 있다. 헌법은 이들에게 그러한 권리를 부여한다"라는 감동적인 문구를 쏟아낸 지 1년 후 한국의 모습이었다. 미국은 그렇게 20년 동안 함께했던 동성 배우자와의 관계를 인정해달라고 한 48세의 제임스 오버게펠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한국은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신고를 통해 법적 인정을 구했던 51세 영화감독 커플의 청을 거절했다.
동성애자에게 쏟아지는 온갖 편견과 불편한 시선을 차치하고라도, 이들이 결혼하려는 노력은 어찌 보면 낯설고 누군가에게는 부질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살면 되지 왜 굳이 결혼을 하느냐고, 요즘 이성커플에게 건네듯 질문 같은 제안을 할 수도 있다. 도대체 결혼이 뭐길래. 결혼은 더 이상 특정 시기에 완수해야 하는 과업이 아니고, 가족이 원한다고 해서 내 인생을 희생하면서까지 감당해야 할 인륜에 속하는 의무도 아니요, 내가 원한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나름의 시대적 저항을 실천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결혼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충고 혹은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결혼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서,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비참할 수 있다는 역설은 어떤가. 김조광수 커플의 신청을 각하하면서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우리 법에서 혼인이 남녀 간의 결합임을 '당연한 전제'로 상정하고 있음을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들었다. 결혼이 이성커플만 향유하는 제도라는 사실이 너무 당연하니 동성커플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차별이 자연스러운 질서가 되면 더 이상 차별이 아니라는 식의 논리였다. 법원은 그렇게 동성커플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일축시킴으로써 엄숙한 톤으로 신청인들의 배제된 처지를 알려줬다. 오랜 기간 일부가 독점적인 특권을 누리느라 그 배제조차 당연해진 상태, 가장 완전한 불평등의 상태를 드러내면서 말이다.
가족이라는 일상의 권리와 의무결혼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제도적 혜택이다. 물론 혜택만큼 많은 의무도 부여한다. 그 결과로 두 사람이 가족으로서 존재하고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게끔 만드는 장치이다. 달리 말하면 평범한 일상을 살기 위해 매번 싸우고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종합선물세트의 혜택과 의무이다. 동성커플은 그런 혜택과 의무가 담긴 권리를 요구한다. 당신들이 누리는 일상이 나의 일상이 되고, 당신들이 겪는 부담이 나의 부담이 되고, 그렇게 당신들도 나도 이 세상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감사하고도 어려운 일을 똑같이 겪고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동성커플이 결혼을 요구하며 말하는 평등이란 그런 것이다.
동성결혼을 인정하면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결정에서는 혼인의 '사회적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제도를 지키려 했다. 법원이 보는 결혼이란 '자녀를 출산·양육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구성원을 생산함으로써 사회의 유지·발전을 위한 토대'였다.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이미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는 20여개 국가들의 예를 볼 때 결혼제도가 무너지지 않으리란 건 분명하지만, 법원이 말하는 의미로서의 결혼을 재평가하게 된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미국이 동성결혼을 헌법상 권리로서 인정한 중요한 전제는, 결혼이 반드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전제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의 자발적 결합을 통해 서로 헌신을 약속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시각이었다.
이 지점에서 동성커플이 이성커플에게 질문을 던진다. "결혼이 주는 혜택이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통한 사회적 역할을 전제로 해야 하는 걸까요? 자녀의 출산과 양육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두 사람의 동반자 관계도 인정받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요? 이성커플은 그런 방식의 '국가적' 결혼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사랑, 친밀감, 신실함, 가족이라는 사적이며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국민 이전의 인간으로서 누리는 삶의 제도로서 결혼을 원하는 것은 아닌가요?"
결혼은 진화하는 패러다임이다그렇게,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성커플과 결혼하려는 동성커플은 같은 질문에서 멈춘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 어떤 의미이며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결혼이 더 이상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아닌 이 시대에,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권리를 갖게 된 이 시대에,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평등한 배우자 관계를 배워가는 이 시대에, 결혼이라는 제도에 켜켜이 쌓인 낡은 억압들을 들어내고 해방을 통해 얻어내려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이 역사적 진보 속에 동성커플을 배제하는 억압도 덜어낼 생각은 없는지.
그리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이 굿리지 대 공중보건부(2003) 판결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나아가는 진보의 방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헌법의 역사는 한때 무시되고 배제되었던 사람들에게 헌법적 권리와 보호를 확장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다른 시민권의 영역에서와 같이 결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공공제도이자 근본적 중요성을 가진 권리로서 결혼은 진화되는 패러다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지혜님은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교수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