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아래 '행성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한 동영상이 올랐다. 불안하게 기울어진 시점의 앵글에는, 우리의 기억에 '난입'으로 편집되어 저장된 정면 프레임에 덧붙여도 좋을 그 이전 1분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오전 11시 30분 국회의사당 앞, '천군만마 국방안보 1,000인 지지선언 기자회견' 중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연설 중이다. 그 연단 너머 왼쪽 무리에 장서연 변호사가 서 있다. 그녀는 문재인 후보의 연설을 정중히 듣고 있다. 연설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그녀는 문 후보가 연설문을 앞섶에 넣는 순간, 지니고 있던 무지개 깃발을 펴들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그녀는 첫 발자국을 뗀 뒤 5초 동안은 문 후보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같은 민변 소속 선후배 변호사이기도 한 두 사람, 그녀는 문 후보가 그녀의 눈을 보길 바랐을 것이다. 분노라기보다는 절망이 그렁거렸을 자신의 눈을. 미소로 화답하는 문 후보의 반응을 확인한 그녀는 하늘을 향해 턱을 들고 외친다.
"저는 동성애자인데 지금 저를 반대하십니까?" 죽음으로 이루고 싶었던 세 가지 소원 4월 26일은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에게 '대통령 후보 토론회 다음날' 이상의 의미가 있는 시점이었다. 그날은 열아홉 살의 성소수자 육우당이 휘경동에 있던 동성애자인권연대(아래 '동인련')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정확히 14년이 되는 날이었다. 2003년 죽기 2주 전만해도 그는 신문에 투고를 했고(한겨레 2003.4.14일자), 3주 전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쓸 대형 무지개 깃발에 "Stop the war!"(전쟁을 멈춰라)라는 문구를 직접 새기러 갔던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이 여섯 가지가 제 유일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육우당(六友堂)'이죠"라는 자기소개와 "제 세 가지 소원은 동성애자 해방, 시조 부흥, 가사 부활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제 소원이 이뤄졌으면 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자신이 두고 가는 삶에 대한 마지막 염원을 남긴 것이다. 삶이 싫고 가볍게 여겨져서가 아니라 그 반대여서 택한 죽음이었다.
그에겐 삶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이름도 많았다. 허난설헌의 이름을 딴 '설헌'이라는 이름으로 커밍아웃을 했고, 시조동호회의 회원이자 인터넷 카페지기로 활동했다. 귀걸이와 파운데이션을 잊지 않고 다녔던 '미동(美童)'이기도 했고, 비록 목사들은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았지만 예수님은 구원해줄 것이라 믿으며 식사 때마다 성호를 그었던 'catholic84'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 냄새 나는' 동인련이 좋아서 그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친 고된 몸을 누이곤 했고, 이천 원짜리 던힐을 천오백 원짜리 디스플러스로 바꿔가며 아낀 돈으로 회비를 냈다.
이 모든 삶을 흔든 결정적 사건은 그가 목을 매기 4주 전쯤에 일어났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소년 보호위원회에 '동성애 사이트'가 청소년 유해매체라는 심의기준을 삭제하도록 '권고'했고, 기독교 단체가 격렬히 반발했다.
"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으로 망했다. 동성애 삭제 권고 수용을 즉각 철회하라." 이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아래 '한기총')의 성명 마지막 문장이었다.
육우당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사람들을 향해 요구했던 것은 권력이나 재산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였다.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일기장과 수첩에 시조를 비롯한 창작물들을 기록해뒀다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글을 올렸는데, 각종 악플과 해킹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커밍아웃한 홍석천, 하리수를 응원하는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가 한기총의 성명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에서 돌려받은 말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회 모순에 저항하며 죽음을 선택했던 이들은 자신의 유서를 광장에 뿌리고,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몸을 남기는 것이 보통이지만, 육우당은 끝내 동인련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 전, 오세인이라는 스무 살 청년 또한 육우당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사무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육우당의 시신을 거두었던 활동가 정욜은 이렇게 말했다.
"둘 다 갈 곳이 여기밖에 없었던 거예요." 육우당의 죽음 이후 동인련 활동가들이 거리로 나섰다. 한기총의 입장에 반대하는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아래 '한기연')의 기독교인들도 청소년보호법 상의 동성애자 차별조항의 삭제를 위해 연대했다. 공감과 이해가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연대라고 부른다. 연대는 정치이념이나 선거공학 너머에 있는 공감과 이해라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서로의 손을 잡는 행위이며 결사다.
그들은 한기총이 입주한 한국기독교연합회관을 찾아가 항의했다. 대학로에서 욕설을 감내하며 팸플릿을 돌렸고, 명동에서 삿대질 속에 집회를 열었다. 1년 뒤, 동성애는 「청소년 보호법」의 유해 단어와 인터넷 금지 단어에서 삭제되었고, 음란물 지정에서도 제외되었다. 이 작은 승리는 서울시의회 농성까지 이어져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계기가 되었고,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이 만들어졌다.
나중으로 밀려도 되는 삶은 없다 1993년 겨우 여섯 명이 모여 '초동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인권모임은 편견과 혐오를 뚫고 부박한 한국 인권 수준의 최저값을 끊임없이 올리고 있다. 기표소 안에서만 정확히 평등한 이 세상의 벌어진 틈을 메우는 이들은 '통합'을 일구어내는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대'하고 헌신해 온 이름 없는 활동가들이기도 하다. 통합이라는 말로부터도 소외된 이 땅의 소수자들은 연대의 힘으로 제 삶을 버티며 이 사회 민주주의의 빈자리를 채운다.
성소수자였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비롯됐던 민주주의에 살면서, 성소수자였던 나이팅게일 같은 박애심은 없을망정, 성소수자였던 앨런 튜링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컴퓨터로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올린 시위 동영상에 기껏 댓글을 단다는 것이 '만만한 우리에게 오지 말고 홍준표에게나 가라' 정도다. 이는 육우당의 죽음을 항의하는 이들을 향해 "기독교인이라면 인권문제에 앞서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던 한기총의 입장과 얼마나 다른가?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였던 육우당의 본명은 윤현석이다. "죽은 뒤엔 당당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유서에 남겼던 육우당의 본명은 그가 죽은 지 10주기가 지나도 공개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에도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청소년 전화 상담자에게서조차 자신의 정체성을 '치료'를 받으라는 권고를 받는 현실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중으로 밀려도 되는 삶은 없다. 대통령 후보를 앞에 두고 장 변호사가 들었던 무지개 깃발은 겨울 내내 광화문 촛불 광장의 하늘에서도 늘 펄럭였었고, 지난 5월 24일 대만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혼을 인정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권경원님은 다큐멘터리 감독입니다. 독립장편 다큐멘터리 <강기훈 말고 강기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