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스부르의 로앙 궁전(Palais Rohan) 미술관에서 예상치 않게 유럽의 명화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 나는 미술관 앞의 샤토 광장(Place du Château)으로 나와서 로앙 궁전 주변을 둘러보았다. 권위와 정통이 느껴지는 로앙 궁전 바로 서쪽 옆에 상당히 대조적인 중세시대 고건축물이 우뚝 서 있었다. 알자스의 시골도시에 서 있을만한 소박한 건물인데, 두 동의 건물이 연결된 듯한 묘한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규모는 꽤 큰 건물이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작고 아담했다. 건물 출입문의 오른편 옆에는 건물의 오랜 역사를 알리는 동판이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샤토 광장에 서서 건물의 정면을 볼 때 왼쪽 건물은 1347년, 오른쪽 건물은 1579년에 각각 건축되었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 말에 최초로 건축된 건물이니 역사가 오랜 전통의 건물이다.
현재 이 건축물은 건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교미술 전문 박물관이 되어 있다. 1931년에 뢰브르 노트르담 박물관(Musée de l'Œuvre Notre-Dame)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포격으로 건물이 일부 파괴되자 박물관의 문을 닫았다가 1956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역사적인 박물관에는 중세시기부터 르네상스 시기까지의 알자스와 스트라스부르 지방의 종교적인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가 오랜 만큼 유물들의 희소성이 높아서 현재는 스트라스부르의 주요 박물관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박물관 설명문을 읽은 나는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광장에 서서 박물관 외관을 다시 둘러보았다. 박물관 건물은 현재 고딕, 르네상스 양식과 함께 알자스 고유의 전통 건축양식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박물관 건물에서는 독일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나는 박물관 입구 매표소의 안내인에게 물어보았다.
"프랑스인데, 이 건물은 꼭 독일 쪽에서 보던 독일 집들같이 생겼는데요?""이 건물이 독일에 점령당했을 당시 독일인들에 의해 개축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점령 당시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건물을 부수지 않고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요. 스트라스부르를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던 기간도 길고 지금도 국경 너머 독일을 왕래하는 스트라스부르 인들이 많다 보니 독일에 대한 거부감은 크지 않습니다."
나는 박물관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볼 때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석조 기둥과 석문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고풍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수백 년 역사의 운치 있는 건물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박물관의 전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 여러 방에는 중세 초부터 17세기까지의 종교 미술품과 함께 성당 건축 유물, 역사적인 종교 문헌 등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나의 눈길을 잡아 끄는 것들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설계도,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11세기의 스테인드 글라스, 15세기의 종교화 등 끝이 없다. 오늘의 여행 스케줄에 포함되어 있지 않던 곳이었지만 고색창연한 유물들을 계속 접하게 되면서 내 머리 속에서 계속 호기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붕대감고 있는 여성,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전시실 안의 유물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서 옮겨온 조각상들이다. 이 조각상들 옆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벽면을 장식한 조각상들을 실물 크기로 촬영한 전시관이 있고, 각 조각상들이 어떤 조각상들인지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흑백사진 속의 조각상들은 마치 진짜 사람이 옆에 서 있는 듯이 사실적인 데다가 조각상 하나하나의 표정이 너무나 다양하다. 눈에 붕대를 감고 아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은 정말이지 황홀하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대성당의 외벽과 내벽을 장식하던 조각상 옆으로는 박물관의 주요 제단을 장식하던 바로크 양식의 작은 채색 조각상들이 모셔져 있다. 조각상 밑의 설명을 보니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한 3개의 조각상인데,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역사 깊은 조각상이다. 이 3개의 조각상은 아기 예수의 탄생, 동방박사들의 예수 숭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조각상 3개의 서로 다른 장면은 상징적인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체인 몸을 벗는 것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종교에 문외한인 내가 성인의 할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어색하기도 하다.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진실, 종교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 작품을 보면서 종교도 그 종교를 만든 민족의 문화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박물관 내에서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스트라스부르의 가톨릭 역사에 대한 영상도 상영 중이다. 몇 시간 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보았던 천사의 기둥이 영상 속에서도 천장 높이까지 솟구치고 있었다.
종교적 신심이 깊어 보이는 프랑스 젊은이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영상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영상을 보는 내내 말 한 마디 없다가 영상이 끝나자 서로 짤막한 영상 평을 나누고 있었다. 빨리빨리 지나치지 않고 박물관 내부의 유물과 영상을 찬찬히 감상하는 그들의 관람 태도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전시관 안에는 이 건물이 박물관이 되기 전에 노트르담 대성당 소속 신부들의 숙소와 대성당 관리사무소로 사용되던 역사를 보여주는 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박물관 건물은 원래 13세기부터 노트르담 대성당을 설립하고 유지 업무를 처리하던 뢰브르 노트르담 협회(Fondation de l'Œuvre Notre-Dame)의 건물로서 노트르담 대성당의 관리사무소로 사용되었었다. 뢰브르 노트르담 협회는 이 자리에서 스트라스부르 지역의 여러 성당을 관리하였다고 한다.
뢰브르 노트르담 협회가 성당을 관리하는 단체였기 때문에 박물관 안에는 특히 노트르담 대성당과 관련된 전시물들이 많다. 뢰브르 노트르담 협회 당시의 관리인이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마치 중세시대의 관리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책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의 책상에는 둥그런 모습의 지구본이 자리잡고 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던 것이 17세기이고 그 지동설은 과학이 발달되기 시작한 근대에 들어와서야 인정되었으니, 저 지구본은 중세 당시 행정관의 책상에는 없었고 최근에 대성당에서 가져온 유물일 듯 싶다.
석재인 사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상들은 파괴의 상처가 그대로 남은 채 일부 부위만 전시 중이다. 터번을 한 남자 조각상은 머리만 남아있는 조각상이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머리에 터번을 쓴 이 이교도는 성당의 화재와 혁명의 시기에 폭파되어 두상만 남아 있다. 머리만 남은 채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인데, 15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조각 작품의 양식이나 유행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핑크 사암에 색채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작품은 날카로운 수염에 세밀한 터번의 주름이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이 두상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의 심리의 미묘한 변화가 잡히는 것만 같다. 터번을 한 이 남자의 눈과 입술을 보고 있으면 이 남자가 무언가를 종교적으로 갈구하는 것이 느껴진다.
다양한 표정으로 묘사된 3명의 인물 흉상은 벽면에 파인 작은 전시공간 안에서 관람자들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다. 목재로 만들어진 이 인물상들은 모두 허름한 복장이지만 깊은 생각, 강렬한 명상을 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긴 우울에 빠져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파괴의 역사를 피한 유물들, 박물관에 전시되다노트르담 대성당의 제단에 모셔져 있던 이 오래된 작품들에서 인물상들의 고뇌와 호기심에 찬 듯한 얼굴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대성당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이 종교를 향한 도식적인 작품이 아니라 다양한 표정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1870년에 파괴된 뇌프 사원(Temple Neuf)과 성 피에르 교회(Église Saint-Pierre) 등 스트라스부르 지역 성당들의 잔해와 흔적들도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노트르담 대성당과 스트라스부르의 여러 성당의 조각과 그림들을 '이성적'이지 못하다면서 파괴했다. 파괴로 무너진 일부 석제 기둥들과 벽면을 장식하던 부조 조각들이 은은한 조명 속에 스트라스부르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다행히 파괴의 역사를 피한 유물들만이 성당을 떠나 박물관의 한 켠에 부상당한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일부 조각상들은 성직자들이 혁명의 광기를 피해 작품들을 가리거나 숨겨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종교의 이상 속에 조각가들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명작들이 깨지고 부서진 모습으로 남겨진 모습들이 처연해 보인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들이라고 해서 파괴를 하는 우매한 역사가 여기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깨지고 부서진 성당의 잔해들을 어둠 속의 옛 성당 기둥들이 지탱해 주고 있었다. 남겨진 폐허의 유적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잔해들은 비교적 근대에 파괴된 것들이라 더욱 처참해 보인다. 역사는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지만 이 쓸쓸한 정경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박물관 앞 광장에는 긴 하루를 지탱해주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박물관의 역사 속에서 나와 다시 현대의 여행 속으로 들어섰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 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