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열심히 삶을 꾸려가고 있는 스무 살 청년입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하나의 기사를 접하고 문득 시장님의 얼굴이 떠올라, 몇 자 적어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접한 기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 4월 6일 충청남도 일부 단체들은 '충청남도 도민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옹호하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을 부정하는 등 잘못된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문제가 있다면서 조례의 폐지를 청구하는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안희정 충남지사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입장 표명을 요청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같은 이유로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인권조례 폐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이를 검토하였고, 지난 8일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포함했다는 이유로 인권조례 폐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관련 기사 :
인권위 "'성소수자 차별금지' 포함 이유로 조례 폐지 안 돼").
인권위는 보도자료를 통해 성소수자 차별 금지가 현재 대한민국이 가입되어 있는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 등 인권조약에 근거한 조약기구들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인권보장의 원칙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더하여 2015년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대해 '성소수자에 대한 광범위한 차별을 금지할 것'을 권고한 사실도 명확히 짚어주었습니다.
또한 인권위는 "성적 지향 또는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 규정을 담은 조례 등이 종교적 의사 표현을 제한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 및 지자체 인권조례가 종교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 표현을 제한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와 같은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유난히 뜨겁고도 추웠던 2014년 겨울을 기억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기사를 보고 박원순 시장님의 얼굴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저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14년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습니다. 성소수자에게는 더욱 험난한 계절이었지요. 물론 추위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소수자들은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습니다. 분노와 울분으로 말입니다.
다만, 박원순 시장님의 공약이기도 했던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겪은 혐오와 차별은 어떤 온기로도 데울 수 없을 만큼 차갑고 아팠습니다. 당시 '반 성소수자 단체'는 "너희 인권이지, 우리 인권이야?" 식의 반 인권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공청회는 대다수 무산되거나 의견수렴이라는 제역할을 하지 못했고, 온전한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은 갈수록 위태로워져만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을 위해 모인 시민위원들은 성숙한 논의와 토론의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명시한 서울시민 인권헌장 원안을 표결에 따라 통과시키는 값진 결과도 이끌어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인권의 원칙과 민주주의의 과정이 합쳐져 탄생한 값진 보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서울시는 '절반 이상이 참여하지 않은 표결은 합의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의 무효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님께서는 개신교계 인사들을 찾아가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발언도 하셨습니다. 이에 성소수자들은 해명을 요구했고,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시장님께서는 논란 당시 성소수자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으셨습니다.
박원순 시장님, '무지개 깃발'을 기억하십니까. 분명 기억하실 겁니다. 시청 로비를 점거하고 사과와 시민인권헌장 즉각 제정을 요구했던 성소수자들의 모습을. 일정마다 따라붙어 무지개깃발을 펼쳐 보이며 울부짖었던 목소리들을. '인권도시 서울'의 정의를 묻던 질문들도요.
2014년 겨울로부터 벌써 두 해가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후 박원순 시장님께서는 성소수자를 부정한 발언에 대해 사과하셨고, 성소수자들은 시청 점거 농성을 해제한 뒤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아직까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편견은 아직까지 공고합니다. HIV/AIDS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요구를 받거나 진료를 거부당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색안경' 때문에 불합리한 조치를 받는 등의 안타까운 상황도 2014년 겨울 이후 서울시 의료기관에 의해 벌어진 바 있습니다.
다행히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은 2016년 9월 2일 해당 병원이 HIV 감염인에게 비인간적 조치를 했다며 직원 전원에 대한 인권교육 실시와 HIV 감염인 진료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인권침해 예방 가이드라인 마련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대대적으로 자긍심을 표출하는 퀴어문화축제의 성사 여부도 전전긍긍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서울시가 지속가능한 '인권 도시'로 남으려면
인권위는 "인권조례는 국제인권규법의 지역화를 위한 것으로, 지역 주민들이 성별·종교·장애·연령·성적지향·성별 정체성 등을 이유로 차별을 받거나 행정서비스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를 규정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 역할을 맡고 있는 서울시 인권기본조례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12조(서울시민 인권헌장) 시장은 인권을 존중하는 가치를 구현하고 지속 가능한 인권도시를 만들기 위해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한다."
박원순 시장님. 혐오 선동으로 무산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제정 절차를 한시라도 빨리 속개해주십시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폭력은 이미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대로라면 서울은 지속 가능한 인권도시로 남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박원순 시장님. 인권을 존중하는 가치를 구현하고 지속 가능한 인권도시를 만들기 위해, 지금이라도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해주십시오. 2017년 세계인권선언일을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및 선포'로 즐겁게 기념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성소수자만을 위한 선언이 아닌 모든 시민을 위한 원칙의 선언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2014년 겨울에 만난 무지개 깃발을, 그것을 들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특수한 이름이 아닌 '서울시민'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를 기억해주십시오.
박원순 시장님의 결단을 기다리며, 인권도시 서울의 모습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17년 06월 09일 금요일
오승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