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 이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에 대한 기록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은 박정희 정권 후반기인 1970년대 중·후반이다. 학생 때부터 소위 '운동권'에 몸 담았던 이들의 젊은 날 초상이 새겨져 있다. '실존 인물이며 실명을 사용했다'는 일러두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자전적 논픽션 에세이다."
서평의 도입부, 이렇게 첫 문단을 쓴 지 일주일이 흘렀다. 이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맴맴 돌 뿐 좀체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난해한 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 잡으면 끝장을 보게끔 하는, 독자를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는 책이었다. 1970년대 살풍경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왜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걸까?
그러던 차에 한 단어가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부채의식'.
그랬다. <영초언니>는 무의식적인 '부채의식'으로 나에게 스며들었다. 최근에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난 뒤,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던 먹먹한 감정이 그랬다.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로, 얼마 전 청문회 과정에서 몸에 밴 검소함과 자기관리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김상조 교수의 '부채의식'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김 교수의 '부채의식'은 지난 6월초 그의 제자라고 밝힌 이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 화제가 됐다.
"(김상조 교수님께) '왜 그렇게 치열하게 하시냐'고 물었더니, '부채의식 때문'이라고 답하셨다. 본인은 80학번인데, 학생운동에 별로 참여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 공부만 했고, 그게 학생의 본분에 맞는 거라 생각했다. 학우들이 몸 내던지고 피 흘리며 죽었는데, 자신은 사회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남아 그 미안한 마음이 '부채의식'으로 자꾸 남는다고 말했다. 자기 세대는 다들 그런 마음일 거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긴급조치 9호'와 '산천초목 사건'<영초언니>의 화자는, <시사저널>(현 <시사IN>)과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냈고, 현재 제주올레 이사장인 서명숙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서명숙의 <고대신문> 4년 선배였던, '영초언니' 천영초.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흐릿한 기억 탓에 벌어진 사소한 착오가 아니라면 모든 게 사실에 기반해 쓰여졌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조차도.
천영초는 1970년대 중·후반 운동권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서명숙과 후배들에게 '걸 크러시'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토론하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여학생들의 서클 '가라열'의 리더였다.
당시는 술자리에서조차 박정희와 정부를 비판하다 걸리면, 잡아다 족치고 가두는 무지막지한 '긴조(긴급조치) 시대'였다. 서명숙은 "1977년 그 해 겨울, 기록적인 한파가 한반도를 덮쳤지만, (영초언니와 가라열 멤버들 덕분에) 정신적으로 따뜻했다"고 기억한다.
1979년 4·19 기념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서명숙은 고향인 제주도에서 체포돼 서울로 연행됐다. 모교인 신성여고 교생실습을 나가기 하루 전이었다. 죄목은 '긴급조치 9호 위반'. 천영초를 우두머리로 하는, 이른바 '산천초목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는 수사·정보기관이 범죄 조직도(그림)를 먼저 그리고 난 뒤에, 퍼즐 조각처럼 조직원들을 끼워맞추는 '기획수사'가 만연했을 때다.
영초언니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명숙은 고문실로 변조된 한 모텔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성동구치소에 나란히 입감됐다. 사기·간통방에 막내로 들어간 20대 초반 여대생 서명숙의 눈에 비친 여사(女舍)의 일상 풍경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름없는 들풀 같은 '소녀 장발장'들부터 박정희 유신정권의 종지부를 찍는 신호탄으로 평가받는 'YH무역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주역들까지, 한 지붕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다.
'박근혜와 천영초, 동갑내기 여자의 다른 인생'
박정희 유신정권에 직격탄을 날린 부마항쟁과 박정희 암살 사건이 벌어진 뒤, 천영초와 서명숙은 석방됐다. 몇 개월 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봄은 짧았고, 긴 군사독재의 겨울이 강제로 찾아왔다. 1980년 광주가 전두환 일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힌 직후 천영초와 서명숙은 함께 광주로 내려가 역사의 상흔을 생생하게 목도했다.
시간이 흘러, 영초언니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정문화 선배와 결혼했다. 정문화는 '서울대 3대 천재'로 불렸던 인물이자, 운동권의 기인이었다. 이후 영초언니에게는 거듭된 시련이 찾아왔다. 머리는 좋지만 '왕따'로 고통받는 아들, 경제 관념이 제로인 남편은 현실의 그늘이 되었다. 급기야 자존감 강하고 총기 넘치던 영초언니는 '다단계의 늪'에 빠졌다. 거듭된 실망에 서명숙은 '영초언니'를 의식적으로 지우고 살았다.
아들과 함께 캐나다로 건너간 영초언니는 안정된 옛 모습을 찾아갔다. 행복은 짧았다. 2002년 이국 땅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해 몇 차례 대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두 눈의 시력을 잃었고 뇌의 60, 70%가 손상돼 단순한 말과 행동밖에 못하는 어린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영구 귀국해 경기도 양평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2006년, 서명숙의 언론계 친정이었던 소위 '<시사저널> 사태'가 벌어졌다. 후배들은 회사 측의 부당한 편집권 침해에 맞서며 배수진을 치고 싸웠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서명숙의 꿈에 영초언니가 자주 나타났다. 친하게 지내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프로이트의 '주둔군 이론'으로 설명했다.
"군인이 전투 중에 밀리면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렀던 고지로 후퇴하는 것처럼,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 심리적 주둔군을 남기고, 어려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주둔군은 묻어둔 서명숙의 '부채의식'이기도 했다.
2007년 1월, 서명숙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박근혜와 천영초, 동갑내기 여자의 다른 인생'이라는 제목의 글도 어찌보면 '심리적 주둔군'의 흔적일 수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7년 1월,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최순실이 호송차에서 내려 특검 조사를 받으러 가는 도중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뉴스를 접한 서명숙은 조건반사처럼 '심리적 주둔군'을 호출한다. 약 40년 전, 호송차에서 내리면서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를 외치고는 교도관에게 입이 틀어막혀졌던 영초언니.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심리적 주둔군'이 호출될 때마다 서명숙은 스스로 '폭풍의 언덕'이라고 이름붙인 외돌개 근처 바위곶을 찾았다. '긴조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도 그랬고, 영초언니가 떠오를 때도 그랬다. 그러한 사연을 품고 있는 외돌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제주올레 7코스의 시작점이 되었다.
서명숙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 노래"라며 "이 노래를 듣고 그녀가 기억의 파편을 온전히 맞추어내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영초언니는 암울했던 박정희 유신시대와 용감하게 맞섰던, 애초 이름이 없거나 잊혀져간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의 대명사다. 영초언니가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은, 우리들이 그 시대를 기억함으로써 함께 찾아나갈 수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서명숙이 고통스럽게 <영초언니>를 꾹꾹 눌러쓴 까닭일 게다. 그게 인간의 심장을 가진 목격자의 운명이다.
※ 저자 서명숙은 이 책의 인세를 모두 영초언니의 간병과 재활 비용에 쓰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