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아버지께서 5·18 그 날 시간, 거기에 계셨을까요. 제 아버지처럼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죽어간, 다른 이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희생자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역사의 이면에서 말도 못 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명예 회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정원영(50)씨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숨진 경찰관 고(故) 정충길씨의 1남 4녀 중 유일한 아들이다. 아들 정원영씨는 11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고인 정씨에 대해 말하다가 자주 울먹였다.
그는 "아버지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쉬는 날이었음에도 퇴직을 앞둔 동료를 대신해 경찰관으로 광주에 투입됐다가 돌아가셨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족들 삶이 완전히 파괴됐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밝혀지지 않는 죽음도 많구나'라며 포기하고 살아왔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씨의 아버지이자 고인이 된 정충길씨는, 최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나와 화제가 된 '5·18 버스 기사' 배용주씨가 당시 몰던 버스에 치여 숨진 경찰관 네 명 중 한 명이다. 당시 정충길 경사 외에도 강정웅, 이세홍, 박기웅 경장 등이 숨졌다.
배씨는 최루탄 연기 등으로 인해 앞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운전했다고 해명했으나, 당시 군 법무관이던 김이수 후보자로 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18년 뒤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앞서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배씨는 당시 상황을 언급하며 "내 차로 인해 희생자가 나왔는데 지금까지 유족에게 사과 한마디 못 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드린다"라고 경찰관 유족에게 사과했다.
정원영씨는 관련해 "그 (사과) 내용을 뉴스로 봤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그분이 아버지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번은 만나고 싶었다"라며 "아버지도 5·18때 숨진 피해자 중 한 명인데,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간 가해자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간 손가락질 받아온 아버지의 죽음,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었던 가족들 억울함은 어디서 보상받을까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볼 때는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도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 중 하나"라며 "아버지께서는 5·18 숨은 영웅으로 불리는 안병하 당시 전남도경 경무관의 '총기 사용 및 폭력진압 금지, 시민 피해가 없도록 유념하라'는 지침에 따라 버스를 맨 몸으로 막다가 희생됐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정원영 씨와 나눈 인터뷰 요지를 1문 1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 아버지께서 5·18 당시 어떻게 돌아가셨다고 들었나."당시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아버지는 40세 젊은 경찰관이었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사시는 성실한 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소문에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졌고, 공수부대가 사람들을 해친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경찰 전투복을 입고 집에 오셨더라. 얼마나 바쁘셨는지 집에 들러 신을 신은 채로 식사하시고는 광주로 떠났다. 그게 제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동네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가 싶더니, 어머니께서 길 골목 끝에서 거의 실신 상태로 실려 오시는 거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다. 상황이 흉흉해 장례도 못 치르고 있다가, 한 달 후에서야 4명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고등학교 졸업 즈음에 아버지 친구분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 그 뒤 남겨진 가족들 삶은, 다른 3명 경찰관 희생자 유족들의 삶은 어땠나."저는 제 아이들에게 아버지 죽음에 대해 '공무 수행 중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만 말했다. 아버지 추모식 날 가족들이 모여도 아버지 얘기를 다 피할 정도로, 가족 모두에게 상처가 컸다. 정신적 충격뿐 아니라 경제적인 타격도 컸다. 어머니는 우리를 키우기 위해 하루 3~4시간만 주무시며 일하곤 했다. 그 시절은 여전히 가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한 가족의 삶이 거의 파괴된 거다. 전국에 흩어진 다른 피해 유가족들도 다들 비슷하게 어렵게 산다. 저는 5·18 자체가 비극적인 현대사라고 본다. 당시 투입됐다가 숨진 경찰관들 가족은 그 죽음을 통해 명예를 얻은 것도, 그렇다고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다. 아버지를 잃고 가족들 삶도 파괴된 셈이다. 당시엔 사망 보상금이라는 것도 따로 없어서 공무원 월급 1000일 치, 장례금 정도만 받은 뒤 끝났다."
- 당시 버스 기사 배용주씨가 이번 청문회 때 사과했는데."언젠가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분이었다. 그분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진짜 책임져야 할 이들은 당시 정권을 뺏으려 했던 세력이다. 다만 (배씨의) 사과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분이 아버지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번은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간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고인의 사망에 대해 어떤 부분이 재조명됐으면 하나."사실 우리 가족은, 저는 그간 '아버지처럼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밝혀지지 않은 죽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살았었다.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아직도 경찰은 가해자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 날 그 시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나중에 듣고 나서도 제가 어디에다가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특정한 개인이 책임져야 할 건 아니라고 본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뺏기 위해 나섰던 책임을 져야 하고, 국가가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죽음에 대해 국가가 그 의미를 재조명하고 희생자들 명예를 회복해줬으면 한다. 이들 또한 피해자임에도, 가해자로 보는 그 시선을 바꾸는 게 첫걸음이 아닐까."
- 김이수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저는 청문회를 보지는 않았고 뉴스로 접했다. 5월을 생각하면 아버지 죽음이 자연스레 떠올라서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 후보자가 배용주씨에게 사과하는 걸 보는데 참 미묘하고 복잡하더라. 우리는 누구에게 사과 받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이번 5·18 추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이 유가족을 안아주는 모습을 보면서도, 감동을 느끼는 한편으로 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어디서 보상받나, 우리는 누가 안아줄까 싶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아버지처럼 죽어간,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런 죽음이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말도 못 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재조명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희생과 억울함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진보적인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고 수호라고 믿는다.
대통령님이 지난 현충일 추념사에서도 애국에 관해 얘기하셨는데, 5·18때 숨진 경찰들의 죽음도 이제는 다시 해석되길 바란다. 또 당시 진압 과정에서 죽어간 사병들, 지휘 계통이 아닌 일반 사병들 또한 넓게는 역사의 희생자가 아닌가 싶다. 이런 피해자들도 대통령이 한 번 안아주셨으면, 지금껏 국가가 돌아보지 못했다고 말해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