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리기 며칠 전, 감기에 걸렸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작년부터 툭하면 감기에 걸린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목감기로 온다. 목이 간지럽거나 아프다가 토하는 것 같이 기침을 한다. 이번에도 목이 살살 간지러워지자 걱정부터 앞섰다. 목도 목이지만 도서전에서 열리는 '독서클리닉' 때문이었다. 못 가면 어쩌지? 작가 혼자 덩그러니 앉아 날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2017년 제 23회 서울국제도서전, 올해의 슬로건은 '변신'이다. 지난 스물두 번의 도서전과 비교해 이름 빼고 다 바꿨기 때문이란다. 도서전은 정유정, 요조, 유시민을 홍보모델로 삼아 미리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거기다가 다양하고 색다른 이벤트로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나도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마음이 동한 사람 중에 나도 껴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가볼까?' 하고 마음이 정해지자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전 접수. 둘은, 구경만 하긴 심심하니 이벤트 참여. 독서클리닉이 눈에 들어왔다. 21명의 작가들이 독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이벤트 같았다.
작가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해 신청하면 됐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의 저자인 서평가 금정연을 신청했다(경쟁률이 무려 수십 대 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독서클리닉은 강연이 아니라 '1:1 맞춤 독서 처방'! 그러니까 작가하고 신청자 둘이 마주앉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떨리게시리!
그런데 하필 목감기에 걸린 바람에 며칠을 살얼음판 걷듯 살아야 했다. 혹여나 독서 처방을 받고 있는데 갈비뼈가 부서져라 기침을 하거나 목이 쉬어서 아예 참가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드디어,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는 날. 나는 혹시 몰라 '용XX(기침을 억제해주는 하얀 가루약)'을 가방에 챙겨 넣고 코엑스몰로 향했다. 독서클리닉 전에 2시간 정도 도서전을 둘러보기로 했다. 도서전에서 무엇보다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서점의 시대.'
지난 도서전들이 강연과 콘퍼런스 중심으로 진행됐다면 이번 도서전은 출판의 다양한 주체가 직접 개입하는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췄단다. 대형 출판사 위주에서 탈피해 독립서점, 소형 출판사까지 확장했다. '책의 발견전'에서는 중소 출판사들이 각자 7권의 책만 선정해 개성 있는 디스플레이전을 열고, '서점의 시대'에서는 전국 각지의 동네서점 20곳이 각 서점 고유 테마를 고스란히 옮겨 와 전시에 다양성을 더했다.
도서전은 코엑스몰 A홀과 B1홀에서 열렸다. 입장권을 들고 A홀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출판사와 그 출판사들이 전시한 책을 구경하는 사람들.
나는 우선 분위기에 적응해야 할 것 같아 목적 없이 두 개의 홀을 휘적휘적 걸어다녔다. A홀을 먼저 훑고 B1홀로 들어섰다. 마침 목이 타던 참에 북라운지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북라운지에서는 맥주도 팔고 있으니 '책맥'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좋을 듯하다.
참가한 출판사가 워낙 많아 어차피 다 둘러보긴 힘들 터였다. 그래서 왠지 마음이 분주해지기도 했는데, 이럴 땐 눈에 띄는 출판사 부스로 들어가 천천히 구경하면 급한 마음이 싹 가신다. 멀리서 바라보다 가끔씩 가까이 다가가 전시된 책들을 살피는 식으로 구경을 마쳤다. 마지막 목적지 '서점의 시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각 동네 책방은 자기만의 콘셉트를 특화해 각기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행전문 책방, 고양이 책방, 헌책방, 지역 대표 책방, 무인 책방까지. 하지만 역시 동네 책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장님의 책 고르는 안목.
대형 서점과는 다르게 판매하는 책 수가 적다 보니 아무래도 사장님의 기호에 따라 전시된 책도 다를 터였다. 그러니 각 책방을 둘러볼 때 서점별 도서 목록 차이도 눈여겨 보면 좋지 않을까. 둘러보다 책 한 권을 샀다. 예전부터 읽어야지 하던 책이었다. 운이 좋게도 저자가 바로 옆에 서 있어서 사인도 받을 수 있었다.
동네 책방을 둘러보며 재미있던 점은, 몇 군데 책방에서 본 책 띠지였다. 보통의 띠지와는 달리 주인장의 코멘트가 적혀 있었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는 "가능하면 술 마시며 볼 것을 권합니다. 그래야 무사히 끝을 볼 수 있습니다"라거나 남덕현의 <한 치 앞도 모르면서>에는 "할매 할배의 서러운 삶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는 이런 먹먹함이라니"라는 식이다. 역시 동네 책방을 찾는 이유는 사장님의 개인적이면서 진솔한 코멘트를 듣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작가와의 1:1 만남
시간은 흘러 어느덧 독서클리닉에 참가할 시간. 10분 전에 도착해 달라고 해서 오후 4시 50분쯤 B1홀로 향했다. 전시장 오른쪽 한 편에 6개의 부스가 마련돼 있고,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름을 말하고 가운데 부스 앞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클리닉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속속 도착했다. 처음으로 서민 교수 얼굴도 봤다. 오후 5시가 됐다. 나는 행여 기침이 날까 용XX을 평소 복용량보다 많이 입에 털어 넣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금정연 작가 앞에 앉았다. 어색하게 씩 웃으며 인사했다.
우선 기분 좋게 시작하는 의미로 나는 금정연 작가의 최근 책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에 사인을 요청했다. 기다리며 앉아 있자 새삼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대화가 무지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
사실 책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고민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스스로 알고 있더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내 고민은 '더 깊이 있게 읽어야 해'라고 늘 생각한다는 점이다. 막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건, 뭐랄까, 깊이 따위 고려하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랄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라고 금정연 작가는 말했고, 나는 바로 이 고민을 털어놨다.
"더 깊이 있게 읽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돼요.""꼭 깊이가 있어야 하나요?""음, 깊이가 있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지 않나요?""그렇긴 하겠죠.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요?""폴 오스터랑... 줄리언 반스랑...""아, 그렇다면요..."금정연 작가는 한 권의 책이나 한 명의 작가를 다각도에서 보는 방법을 추천했다. 깊이를 얻는다는 게 하나의 주제나 작가만 파고 들어가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넓은 시선에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보거나, 작가가 본인의 책에서 언급한 책을 따라 읽어보는 것.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재미있었다면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책으로 독서를 확장해가는 것. 이런 것도 다 깊이 있는 독서라는 거였다. 나는 수긍이 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에 하던 독서 관련 생각을 부담 없이 털어놓았다. 금정연 작가는 내 생각에 자주 동의를 표했고 가끔 조언도 해 주었다. 때로는 내 쪽에서도 질문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글을 쓰실 때 자주 우시나요?"
이 질문을 한 건 금정연 작가 책에 '울고 싶다'는 표현이 많이 나와서였다. 심지어 인터넷 서점 자기소개에도 '울었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온다. 작가는 내 질문에 부끄러운 듯 웃더니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도 풋 웃고 또 무슨 질문을 할까 머리를 굴렸다.
독서클리닉은 독서 초보자에게나 나처럼 원래 책을 즐겨 읽는 사람에게나 다 좋을 듯했다. 책을 읽는데 마땅히 따라야 할 방법이란 게 있을 리야 없겠지만, 가끔 자극은 필요하다. 자극을 통해 한 단계 껑충 독서 수준을 높일 수도 있고, 모르던 작가 책을 읽거나, 새로운 시선으로 독서를 바라볼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신청자에게 독서클리닉은 의미 있는 자극제가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다음 해에는 더 많은 작가들이 독서 처방에 나서 주면 좋을 듯했다.
33분의 대화를 끝내고 금정연 작가가 대화 도중 끄적이던 메모를 얻어 부스에서 나왔다. 엠마뉘엘 카레르와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이 좋다고 해서 읽어볼 생각이었다. 아참, 독서클리닉은 '사전 접수제'라 지금 신청할 수는 없다. 그러니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음 해를 노려보세요!
그렇다고 도서전 이벤트가 이것만 있는 건 아니다. 나도 둘러보며 발견했는데 각 출판사 부스에서 작가와의 만남이 꽤 자주 진행됐다. B1홀의 이벤트 홀 두 곳에서는 강연도 열리고 있었다. 주말에는 배수아, 황석영, 김탁환 작가 등 유명한 작가들도 작가와의 만남에 얼굴을 비친다고 한다. 서울국제도서전 일정표에서 작가와의 만남 시간을 미리 파악하고 그 시간에 맞춰 들러 본다면 더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