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엔 가슴 설레어 온 낭만의 파도, 산정엔 마을 수호신을 모신 박씨당 김씨당, 불교의 도량 고경사, 왜적의 침략 시 불을 놓던 이길 봉수, 조상들이 영면하는 공동묘지, 어머니의 젖줄 같은 돌새미, 우리의 삶의 터전 고리 축항, 미역 바탕, 큰돌, 작은돌, 무지개, 큰개내, 작은개내 웃각단, 아랫각단, 곤닥구시개."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 고리원자력본부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고리추억비(古里追憶碑)'는 고리 1호기가 세워지기 전 옛 마을 '고리(古里)'의 풍광을 이렇게 추억하고 있었다.
옛 마을 '고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40년 만인 2017년 6월 18일. 이날 자정을 기해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고리추억비가 새삼 눈길을 끌고 있다.
고리추억비에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옛 '고리' 마을의 역사와 풍광, 이를 노래한 민요, 정감했던 당시 주민들의 이름과 고리 1호기가 건립될 당시 상황이 오롯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추억비는 이해웅 시인이 글을 짓고 오제동씨와 류영남씨가 앞뒤로 글씨를 새겼다. 비를 세운 주체는 한국전력공사 고리원자력본부였다. 1977년 6월 19일부터 임시 운전을 시작해 1978년 4월 29일부터 첫 상업운전에 들어간 고리 1호기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87년 1월 세워졌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다.
2015년 10월 타계해 지금은 고인이 된 이해웅 시인은 1940년에 이곳 고리에서 태어났다. 등단 후 시인은 부산시인협회장, 부산작가회의 고문을 역임했고 부산시문화상을 받은 부산 시단의 개척자였다. 그는 은퇴 후 고리향토사 편찬위원장을 맡아 623쪽에 달하는 '고리향토사와 스토리텔링'을 출간하며 늘 고향의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왔다.
이해웅 시인은 비문에서 "지금은 흘러간 정다운 이름들 악쌔기, 짜잽이, 차돌이, 골목개 노랭이, 새집할매, 대학생 면장, 청년학도야"라며 함께 살았던 마을 주민과 동무, 그리고 마을 강아지까지 추억했다.
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긴 이 비문에는 고리원전 건립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던 당시 주민상황과 마을 이름 변천사, 고리 1호기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을 함께 알 수 있는 글도 실려 있다.
고리 1호기 건립으로 이주한 마을주민은 모두 148호, 162세대 1,250명이었고, 이들은 1969년 4~9월 사이 울주군 서생면 신리 골매마을과 길천리, 월내리, 동백리(운청), 부산, 울산 등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마을 이름은 '알개' → '아리개' → '아리포' → '화살포' → '화포(火浦)' → '고동(古洞)' → 고리(古里)로 변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화포(火浦)'라는 지명이 원자력발전소의 입지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고리 1호기에 대해서는 "소금강을 방불케 하던 아름답던 마을 바닷가에 울창했던 소나무 숲과 기암괴석 경위로만 살아가던 어진 촌민들. 고리는 마을 이름에 불을 안았던 인연으로 오늘 여기 민족웅비의 힘의 원천 원자력 발전소가 섰네"라고 기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당시 대한민국이 겪고 있던 만성적인 전력난을 타개하고 산업발전의 원천이 된다니 마을 주민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을 테고 시인은 이를 비문에 반영했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지난 18일 자정을 기해 영구정지된 고리 1호기는 40년 전 고리마을이 사라졌듯이 해체과정을 거쳐 15년 후면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이아무개(44 · 교사 · 부산 중구)씨는 "이해웅 시인이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어떤 감회가 들었을지 궁금하다"며 "아마 아쉬움도 있겠지만 우리나라가 탈핵으로 가는 역사적인 이날을 함께 축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40년 전 고리마을은 국가발전과 민족웅비의 원천을 건설한다는 대의에 따라 기꺼이 사라지는 운명을 받아들였다"며 "고리 1호기도 탈핵시대를 열려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대의에 따라 옛 고리마을과 운명의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뉴스행동에 동시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