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앙 정부나 지자체를 가리지 않고 마을공동체 활성화 또는 재생 지원 사업이 유행이다. 그런데 성과를 만족스럽지 않다. 지원하기 이전에 놓친 게 있어 그렇다. 마을공동체나 지역사회를 되살리려면 법이나 정책, 보조금 예산 이전에 먼저 챙겨야 할 일이 있다. 그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일을 벌이면 반드시 실패한다. 바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다.
불행히도, 한국 사회는 국가나 지역 단위를 불문하고 공동체의 재생과 활성화를 촉발하거나 공동체사업을 정상적으로 추진, 견인할 만한 사회적 자본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다. 신뢰, 협동, 연대, 참여, 규범, 네트워크 같은 혁신적 동력과 창조적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 암울하고 불행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짚어보면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봉건 조선왕조, 일제 식민지배, 동족상잔의 전쟁, 군부독재 등의 반사회적 암흑기에 심신이 온통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미처 사회적 자본을 생산하거나 축적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계, 두레 등 농경사회의 전통적 유산, 심지어 새마을회 같은 국민운동단체나 바르게살기운동 같은 우익관변단체를 사회적 자본이라 우기는 반론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과연 이 사회의 혁신에 얼마나 쓸모가 있는 사회적 자본인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현실이 이해조차 되지 않는다.
특히 농촌 지역의 사회적 자본 잠식 또는 파산 상태는 심각한 지경이다. 지난날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를 향한 개발독재 경제 추진 과정에서 농촌지역의 인적 자본은 대거 도시로 이동했다. 폐농, 이농의 결과다. 이 무렵 전통적인 농촌 마을사회의 사회조직 또는 공동체조직이 와해되고 공동체 규범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인적 자본의 약화는 농촌마을과 지역사회의 지도력, 조직력 약화와 상실로 직결되었다. 농촌 지역사회 내부에 그나마 축적되었던 사회적 자본이 쇠퇴, 소멸되면서 농촌 지역사회의 활력과 동력은 훼손, 상실되고 만 것이다.
사회적 자본 말고 다른 편법은 없다여기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마을 만들기', '사회적 경제' 등 마을과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사업(Community Business)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행정의 예산과 관심이라는 지원도, 주민의 의지와 학습이라는 자세도, 전문가의 경험과 역량이라는 기술도 다 아니다. 신뢰, 협동, 연대, 참여, 규범, 네트워킹 같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최우선 선결 조건이다. 사업을 벌이는 마을과 지역사회 공동체 안에 충분히 내재·축적된 지역 고유의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는지, 그걸 충분히 꺼내서 활용하고 있는지가 사업 성패의 열쇠라고 단언한다.
즉, 마을공동체 내부에 사회적 자본이 없다면 사업을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끼리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연대하지 않는다면,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더불어 배려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마을공동체사업은 벌이지 말아야 한다. 용케 관의 특별한 관심과 지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해도 시작부터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셈이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하려면, 스스로, 내발적이거나 자생적으로 마을공동체의 규범과 관계망을 형성하고 강화할 수 있는 자체 동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결국, 마을·지역사회 공동체의 문제 해결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는 유·무형의 자산으로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바탕이 되고 전제되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마을공동체사업을 벌이면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인적 자본, 물적 자본 등 여타 자본이 절대 부족한 농촌 지역에서 어떤 일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신뢰와 협동 같은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농촌 마을공동체 사업을 준비하는 마을주민들은 마을사업을 신청하기 전에, 우리 마을의 사회적 자본이 어떤 게 있는지, 얼마나 있는지, 어떤 쓸모를 지니고 있는지부터 냉정하게 조사하고 확인하고 정리해두어야 한다. 조사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아쉽지만, 마을공동체사업에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 이장이나 마을 어른의 전횡을 말려야 한다.
그런데 거듭 말하건대, 한국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한국의 국민이라면,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공동체가 주체적으로, 창조적으로 사회적 자본을 배우고 축적할 기회나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신뢰와 협동보다 의심과 불신과 경쟁과 독단이, 규범과 네트워킹보다는 편법과 탈법과 위법과 이기주의가 국가와 사회를 운용하는 기본원칙과 질서로 통용됐기 때문이다. 다 들 "부모님 모시고 처자식과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만 늘어놓고 죄의식과 수치심도 별로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고 오히려 따지고 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공동체를 지원한다는 이런저런 법과 제도를 만들기 이전에 농촌공동체 재생과 활성화에 요긴한 사회적 자본부터 새로, 충분히 발굴, 개발, 육성, 축적해야 한다. 늦었지만, 어렵지만, 다른 편법이나 꼼수는 없다.
'결합(Bonding)'보다 연결(Bridging)'과 '관계(Linking)'를 무엇보다 농촌공동체 사회적 자본의 생산과 개발을 촉발시킬 동력은 인적 자본, '사람'일 것이다. 특정 지역 내부, 일부 집단 사이의 폐쇄적, 배타적, 고립적 '결합(Bonding) 사회적 자본'은 그 지역 내부, 일부 집단 사이에서는 중요하겠지만, 자칫 자충수나 족쇄가 될 수 있다. 오히려 외부와 교류, 공생, 외연의 확장에 장애나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결합(Bonding)' 사회적 자본보다는 우리와 다른 지역, 우리와 다른 외부인 등과 열린 생태계에서 상호호혜적으로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도록 '연결(Bridging) 사회적 자본'과 '관계(Linking) 사회적 자본'의 플랫폼과 네트워크 구축에 힘쓰는 게 필요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도 결합(Bonding) 사회적 자본은 또래, 같은 인종, 같은 종교와 같은 사회화 과정에 동일한 특성들 사이에 생겨나는 사회적 자본으로 규정했다. 미국과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적 자본, 즉 연결(Bridging)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계층갈등, 문화갈등, 지역갈등 등의 양극화 적폐가 산적한 한국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농촌 지역의 사회적 자본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작동하는가. 과연 어떤 에너지를 지니고 어떤 효과를 발산하는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정기환 연구위원은 "농촌 지역사회 내의 공식적·비공식적 사회집단 또는 구조 속에 존재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집단에 속한 개별 구성원이나 집단이 추구하는 이익이나 목표 달성을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농촌 지역 사회적 자본으로 정의한다. 구체적으로 사회집단이나 사회구조 속에서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상호 작용으로 행하는 사회적 교환과 보상, 협동, 경쟁, 그리고 갈등 해소 메커니즘 등이다.
무엇보다 다행히도, 한국의 전통적 농촌 지역 마을공동체에서는 연대적(결합, Bonding) 사회적 자본 못지않게 교량적(연결, Bridging) 사회적 자본 또한 높게 나타난다고 평가한다. 이는 마을 사회집단의 연대 의식이 높고 사회집단 간 협동적 관계가 원만하게 지켜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 연구위원은 "농촌 지역 마을개발을 위한 정부의 각종 지원정책이 시행되면서 마을의 한정된 자원 이용, 개발사업 참여 여부 및 정도, 이익 분배, 개발의 주도권 등을 둘러싸고 마을공동체 및 지역사회 내부에서 반목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가령 정부 지원 농촌 지역개발사업의 경우, 마을 주민 총회, 개발위원회, 추진 및 운영위원회 등의 의사결정기구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합의 및 총의에 이른 후, 주민 의사가 반영된 내발적이고 상향식의 주민 주도 계획에 의거해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때 마을 주민 총회 등 주민 의사결정기구는 퍼트남 등이 강조한 교량적(Bridging) 사회적 자본을 형성, 확충해주는 장치이자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아울러 농촌 지역개발의 핵심 주체인 정부와 주민 사이의 파트너십, 지역사회 단위의 협력체제(지자체, 기업, 대학, 연구소, 전문가 등)를 강화할 필요도 있다. 특히 정부, 주민, 전문가 등 이른바 마을공동체사업의 핵심 3 주체가 참여, 교육, 컨설팅 등을 통해 농촌 마을공동체의 계획 및 개발에 필요한 사회적 자본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중간지원조직의 구축도 절실하다. 농촌 지역의 공동체사업의 주체가 될 '민주시민'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중간지원조직이 사회적 자본을 개발하고 생산하고 공급하는 '사회적 자본의 발전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자본 발전소'를 지역마다 세우자 농촌에 살기도 어렵고, 농촌을 살리기도 어렵다. 농촌을 살려보려고 벌이는 온갖 마을공동체사업 현장은 마치 여러 시행착오와 오류의 집하장 같다. 당초 정책의 목표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례가 흔하다. 일단 정책모델의 설계 오류라는 태생적 병인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일이 하나 되는 주민의 생활 터전인 순정한 농촌을 외부인의 구경거리인 관광지나 공원처럼 훼손하고 개조한 결과다. 마을과 공동체를 잘 모르는 토건 개발자 등 외부 용역업자들이 선무당 악역을 도맡아 사업을 추진한 것도 화근이다. 그렇다고 정책의 선의까지 의심하자는 건 아니다. 농민들이 연 1000만 원의 농사소득으로 먹고살지 못하니 농외소득을 따로 창출해 소득을 보전해주려 했을 것이다. 그래도 얼마든지 불행한 결과가 예측 가능했던 사업과 사례지가 적지 않아 아쉽고 안타깝다.
농촌 지역 개발, 사회적 경제 등이 농촌공동체의 활성화와 지역사회의 재생을 위한 유력한 도구이자 방법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질적이고 유의미한 성과를 얻으려면 미처 몰랐거나 미뤄뒀던 숙제를 하나 풀어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행정의 추가 지원도, 주민의 역량 강화도, 전문가의 자격 인증도 결코 아니다. 정책이나 제도의 기본적인 개념과 패러다임부터 크게 수정하고 혁신해야 한다. 새로운 사업은 타당한 입구 전략부터 다시 세워놓고 일을 벌여야 한다. 이미 벌어진 사업의 시행착오와 오류는 합리적인 출구전략으로 어서 빠져나와야 한다.
입구나 출구는 모두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부터 시작한다. 사회적 자본의 보유 여부와 활용 정도가 사업 성패의 열쇠를 쥔 셈이다. 단순히 법·정책·제도의 문제로만 고민하지 말라는 얘기다. 마을주민 서로, 그리고 주민·행정·전문가 등 이른바 '마을공동체사업 3주체'끼리 사회적 자본을 바탕으로 유기적인 사회적 관계를 먼저 구축해야 한다.
마을과 지역사회 공동체 내부에 '신뢰·협동·연대·참여·규범·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을 넉넉하게 생산, 비축해둬야 한다. 따라서 계, 두레 등 기존의 유명무실한 전근대적 전통 사회적 자본 말고,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농촌형 사회적 자본을 새로 생산·발굴·개발·육성·축적해야 한다. 이때 농촌공동체 내부만의 폐쇄적· 배타적·고립적 '결합(Bonding) 사회적 자본'으로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공동체 이기주의로 인한 갈등·반목 등의 부작용과 폐해만 야기할 위험이 있다. 사회적 자본도 밖으로 나가 타인이나 외부와 기꺼이 공유해야 한다.
그러자면 '연결(Bridging) 사회적 자본'과 '관계(Linking) 사회적 자본'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도 다인종 사회가 평화롭게 유지되려면 연결 사회적 자본 등 다른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인적 측면에서 '지역사회 생활기술 직업전문학교', 물적으로 '유휴시설 지역공유 사회적 경제 자산은행', 조직적으로 '지역 단위 공동체사업 협동·연대 경영체', 플랫폼으로는 '마을공동체·사회적 경제 융합 중간지원조직'이라는 4대 사회적 자본 발전소 입구 및 출구전략을 제안한다. 이때 '농민 기본소득' 같은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 전략이 선행·병행되면 효과는 더 확실해진다.
덧붙이는 글 | ※ 마을학개론(an introduction to Communology/ 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 : 귀농을 하거나 자발적 하방을 해서 마을에서 먹고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마을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을, 공동체, 마을시민. 마을기업, 대안마을, 대안농정, 그리고 대안사회를 열심히 공부해서 체화해야 한다. 그러면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