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어느 날, 꾸물꾸물한 하늘에 불안감을 느끼며 오전 일찍 런던 고속버스 터미널(Victoria Coach Station)의 무인발권기에서 가장 빠른 시간에 출발하는 옥스포드(Oxford) 행 버스표를 끊었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표에 플랫폼 정보가 없다. 시간은 다 돼 가는데 마음이 급해 우왕좌왕 하다가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이건 그냥 영수증이고, 터미널을 나가 건너편 건물 내에 있는 National Express 사무실을 찾아가서 표와 교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5년 전 에든버러(Edinburgh) 행 야간버스를 탈 때는 그냥 여기 플랫폼에서 바로 탔던 것 같은데 뭐가 이리 복잡한가 싶어 서둘러 겨우겨우 찾아갔지만 이미 시간은 지나버린 뒤였다. 이대로 돈을 날리는가 싶어 직원에게 사정 얘기를 하니 의외로 쉽게 다음 차편으로 교환해 주고 해당 플랫폼 위치를 알려준다.
친절한 서비스 덕에 돈을 안 날린 건 고맙지만, 명색이 런던인데 버스 탑승 시스템 하나 통일을 못 해서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 건가 궁시렁대다보니 역시 모든 게 일사천리로 간편한 한국이 최고구나 싶었다.
어쨌든 약 한 시간 반을 달려 옥스포드 시에 도착했다. 이 작은 도시가 최근 더 유명해진 건, 대학교의 대표 컬리지 중 하나인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내에 있는 일명 '해리포터 다이닝 홀'로 알려진 'The Great Hall' 때문이다. 아일랜드에서 본 '롱 룸(The Long Room)'과 '모허 절벽(Cliffs of Moher)'에 이은 세 번째 '해리포터 기행'인데, 어쩌다보니 전 시리즈를 다 보지도 않은 그놈의 영화 촬영지를 이렇게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다.
기대감을 안고 교회에 도착해서 입장권을 끊으려는데 오늘은 홀 관람이 안 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다른 관광객들도 왔다가 모두 실망하며 돌아가기 일쑤, 내일은 개방한다는데 이것 때문에 내일 또 올 수는 없고 해서 일단 왔으니 다른 곳이라도 둘러보자 해서 표를 끊고 교회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시큰둥했다. 게다가 내부 갤러리로 들어가려니 또 2파운드 짜리 표를 사야 한다는 말에 이제는 뿔까지 났다.
이래저래 기분이 상해서 시내나 대충 돌아보고 런던으로 일찍 돌아가자고 마음 먹었다. 조용하고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젊음의 활기가 있는 아기자기한 거리 이곳저곳을 조금은 뚱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한 외국 여성이 다가와 지금 막 옥스포드 컬리지 워킹투어를 시작하려는데 참가해 보지 않겠느냐 권유하길래 충동적으로 신청해 버렸다.
인원이 어느정도 채워진 후 중년의 영국인 여성 가이드는 우리를 데리고 시내 곳곳의 유명한 컬리지들을 다니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다국적 참가자들을 위해 영국식 억양으로 또박또박 천천히 설명하면서 중간에 내가 이해를 못 할까봐 신경까지 써 준 그녀의 배려심이 무척 고마웠다.
다는 기억을 못 하지만 오래 전에 어떤 컬리지 내에서 키우다가 사라진 거북이 혹은 자라들을 몇 마리만 빼고 거의 다 찾았는데, 워낙 수명이 긴 터라 아마 못 찾은 애들이 지금도 컬리지 어딘가에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는 소문, 그리고 시험 기간 내에 옥스포드 학생들이 입는 유니폼에 꽂는 꽃의 색깔이 시험 진행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등 '알아두면 쓸데 있을지도(?) 모를 잡학사전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와중에, 그녀가 '이웃에 있는 어떤 작은 학교...'라며 경쟁교인 '케임브릿지'를 능청스레 디스할 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영국 최초의 돔형 도서관으로 보들리안 도서관의 열람실로 쓰인다는 레드클리프 카메라(Radcliffe Camera)를 비롯 이곳저곳을 돌다보니, 의외로 해리포터 시리즈의 숨은 촬영지들이 꽤 있어서 트리니티 컬리지에서의 '아픔'이 조금은 치유된 듯했다.
탄식의 다리 :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Oxford)에 있는 하트퍼드 칼리지의 신(新)·구(舊) 건물들을 연결하는 석조 다리이다. 1914년에 완공되었으며, 대부분은 토마스 잭슨(Thomas Jackson) 경이 설계하였다. 베니스의 탄식의 다리를 본떠서 만들었다는 설과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탄식을 하며 지나간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내내 즐거운 분위기로 진행된 투어가 끝난 후 돌아오는 런던 행 버스 안에서 문득 오늘 새벽에 꾼 꿈이 떠올랐다. 평소 꿈을 워낙 자주 꾸다보니 꿈의 해석에도 관심이 많은 터인데, 아침 내내 궁금했던 그 꿈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난 조만간 어느 남자 미술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예정이었는데, 그분이 앞서 자신의 작품 경향과 수업 방향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분 작품의 핵심 주제는 한 마디로 하나의 대상에서 두 가지 면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성격의 여러 작품들을 보여주다 마지막에 상당히 큰 그림 하나를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세상을 좀 더 크고 넓게 보라고...내가 처음 옥스포드에 오려던 주된 이유가 '해리포터'이긴 했지만, 만일 끝까지 그걸 놓치 못하고 그냥 실망한 채 떠났더라면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시간낭비 밖에 안 됐을 것이다. 사실 옥스포드 시의 진짜 주인공은 해리포터 식당이 아니라 옥스포드 대학교인데 말이다. 어쩌면 우연찮게 투어에 참가하게 된 게 나에겐 작은 행운인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추후 제 개인 블로그 http://arinalife.tistory.com/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