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느 고장을 떠올릴 적에 다른 분들하고 참말로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경주라고 하는 고장을 들면 흔히 불국사나 첨성대를 떠올리는 분이 많겠지요. 그러나 저는 경주라고 하면 '소소밀밀'이라고 하는 그림책 전문 책방이 있는 고장이라고 떠올립니다.
제주라고 하면 '책밭서점'이라는 오래된 헌책방이 이쁘게 있는 고장이라고 떠올려요. 춘천이라고 하면 '경춘서점'이라는 아름다운 헌책방이 있는 고장이라고 떠올리고, 전주라고 하면 '홍지서림'이나 '책방 같이'나 '조지 오웰의 책방' 같은 곳이 어여쁜 고장이라고 떠올립니다.
그리고 속초라고 하면 중앙시장 언저리에 있는 작은 헌책방이 살뜰한 고장이라고 떠올리면서, '동아서점' 같은 씩씩한 책방이 있는 알뜰한 고장이라고 떠올립니다.
서점 해볼 생각 있느냐? 2014년 8월의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막 일어난 내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버지였다. (17쪽)
속초에서 서점을 하겠다고 얘기했을 때 내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1쪽)아버지가 지은 책방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젊은 책방지기 김영건 님이 쓴 <당신에게 말을 건다,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알마 펴냄)를 읽으면서 속초라는 고장에서 책방 한 곳이 새롭게 태어나는 흐름을 헤아려 봅니다.
글쓴이요 책방지기인 김영건 님은 책방집 아이로 태어나고 자랐으나 딱히 책방지기라는 길을 걸을 생각이 없었다고 해요. 마땅한 노릇입니다. 책방집에서 태어났대서 굳이 책방지기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빵집에서 태어났대서 꼭 빵 굽는 일꾼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청소부 어머니를 두었기에 꼭 청소부가 되어야 하지 않고, 교사 아버지를 두었기에 꼭 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별것 아니었다. 좋은 기능을 갖추고 튼튼해 보이는 서가들 사이에서 느꼈던 뭔지 모를 부족함은 바로 그것들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것. (42쪽)
서가의 분류도 서점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인터넷서점이 아닌 '서점'에 갈 최소한 한 가지 이유는 확보한 셈일 것이다. (61쪽)<당신에게 말을 건다>는 책방집 아이로서 어떤 어린 날을 보냈는가 하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책방집 아이로서 다른 책방과 이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짚습니다. 얼결에 책방지기 길을 걷는 삶이 되고부터 생각이나 눈썰미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하는 이야기도 차곡차곡 털어놓습니다. 함께 책방지기를 하는 곁님이 김영건 님을 어떻게 이끌어 주면서 속초 책방 <동아서점>이 씩씩하고 튼튼하게 서도록 북돋우는가 하는 이야기도 담아내요.
<당신에게 말을 건다>는 대단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를 다루어야 하지도 않고요. 책이름처럼 '말을 거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속초를 아직 더 속속들이 헤아리지 않는 이웃님한테 말을 거는 이야기가 흘러요. 속초를 좋아해 주거나 사랑하고 싶은 이웃님한테 넌지시 말을 거는 이야기가 흐르지요. 속초라는 고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웃님을 마주하는 책방지기로서 하루하루 길어올리는 이야기가 흐른답니다.
라면에 양은냄비까지 얹어주기로 했던 어느 힘센 출판사와 온라인 서점의 합작은 나 같은 동네서점 사람에겐 그저 웃어넘겨야 할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울상 지어 봤자 봐줄 이 하나 없으므로. (105쪽)
구매로 이어지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꼭 구매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방문한 손님들이 독립출판물 매대에 잠깐이라도 머무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절로 흐뭇했다. (112쪽)책방이 있는 고장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책방이 없는 고장은 그다지 마음이 안 끌립니다. 책방이 한 곳이라도 있는 고장일 적에 비로소 마음이 끌립니다. 모든 사람이 꼭 책을 읽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저마다 즐겁게 삶을 새로 배우고 아이들을 새롭게 가르칠 수 있으면 무척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책으로만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아요. 학교에서만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아요. 손수 밭을 일구거나 집살림을 건사하면서 배우거나 가르치는 삶이 있어요. 손수 구름이나 하늘을 읽으면서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배를 저어 고기를 낚는다든지 미역을 걷는다든지, 또는 갯벌에서 조개나 바지락을 캔다든지, 들에서 나물을 훑는다든지, 숲에 나무가 우거지도록 따사로운 손길을 보태면서 배우거나 가르치는 살림이 있지요.
책 한 권이란, 이 책을 쓴 사람이 지은 모든 삶을 알뜰히 갈무리한 슬기꾸러미라고 느껴요. 모든 책이 슬기꾸러미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책을 새로 지으려고 하는 분이라면, 이 책 한 권에 지은이 나름대로 생각하고 살피고 배우고 찾고 받아들인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슬기를 담는다고 느껴요.
한자말로는 작가라고 합니다만, 한국말로는 글쓴이나 지은이라는 이름을 써요. 글쓴이는 이름 그대로 글을 썼다는 뜻이고, 지은이는 새로 짓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책 한 권만 새로 짓지 않고, 책에 깃들 이야기와 삶을 스스로 새로 짓는다고 하기에 지은이 같은 엄청난 이름을 붙여 줍니다.
할머니가 어찌나 힘찬 목소리로 아버지를 맞았는지, 매장의 모든 손님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때부터 그녀는 순진한 학생처럼 아버지에게 자신이 찾는 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좀 전의 불안은 온데간데없이 한없는 안도감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124쪽)책방이 있는 고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한나절을 즐거이 일하고, 다른 한나절을 즐거이 살림을 지으며, 다른 한나절은 느긋하게 쉬다가, 다른 한나절은 책 한 권을 곁에 두면서 새로운 길을 배울 수 있도록 책방이 있는 고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도 아이도 스스로 마실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도록 쉼터 구실을 하는 책방이 있는 고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사람도 나그네도 홀가분하게 찾아와서 스스럼없이 여러 가지 책을 살피다가, 아하 하고 무릎을 치면서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꾸러미를 만나도록 이음터 노릇을 하는 책방이 있는 고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속초에 <동아서점>이 즐겁게 뿌리를 내린다면, 고성 양양 동해 강릉 양구 인제 화천 홍천 정선 평창 횡성 원주 같은 고장에는 어느 책방이 즐겁게 뿌리를 내리려나요. 강원도 골골샅샅, 그리고 이 나라 골골샅샅, 꼭 커다란 책방이어야 하지 않으니, 작고 조촐하게 이야기꽃밭이 되는 마을책방이 한 곳 두 곳 태어나고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느 고장이든 저마다 고운 책방을 여러 곳 품으면서 마을사람한테 싱그럽고 슬기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삶터로 날개돋이를 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가없이 멋스럽고 해맑은 길을 걸을 만하지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당신에게 말을 건다,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김영건 글 / 정희우 그림 / 알마 펴냄 / 2017.2.20. / 11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