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안의 화제인 TV프로그램 알쓸신잡은 나 역시도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하지만 여느 시청자들과 달리, 나는 그저 마음 편하게 '알쓸신잡'을 볼 수만은 없다. 끝이 없는 남자들의 토크에 걱정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받아 적어야하는 '프리뷰어'에 대한 걱정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TV를 좋아했던 나는 '걸어 다니는 편성표'라고 불릴 정도로 각 방송사의 시간대별 프로그램을 꿰뚫고 있었다. 대학을 진학할 땐 자연스레 진로를 신문방송학과로 택했고, 취업을 고민할 때쯤엔 방송작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정성스레 적어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번번이 떨어지기 일쑤였고, 나는 큰 좌절을 해야만 했다. '내 길이 아닌가?' 생각할 때 쯤 방송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한다는 '프리뷰 아르바이트'를 알게 되었다.
프리뷰란 한 마디로 영상을 문서화 하는 작업이다. 방송을 위해 제작진들이 촬영해온 무편집본 영상 파일들을 보면서 이 파일에는 어떤 장면이 찍혔고, 어떤 내용의 인터뷰들이 담겼는지 일일이 기록하는 일이다. 이렇게 모인 수십 장, 수백 장의 프리뷰 노트를 PD와 작가가 보면서 6,000분, 60,000분이 넘는 영상들을 어떻게 편집하면 좋을 지 고민한다. 듣기엔 쉬워 보이지만 그리 만만하게 볼 작업은 아니다.
처음 'KBS구성협의회 홈페이지'를 통해 구했던 프리뷰 영상은 1시간 30분 길이의 파일이었다. 3,4시간쯤 걸릴까 예상했던 작업은 약 10시간 정도가 소요됐고, 나는 일을 마친 후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앓아 누워야만 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노하우가 생겨 소요되는 시간은 줄었고, 지금은 1시간 파일에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든다.
1시간 영상을 받아 적는 것인데 왜 3시간이 걸리느냐. 단순히 말만 받아 적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 분 몇 초에 어떤 영상이 담겨있는지 타임체크도 해야 하고, 화면의 구도, 출연자의 움직임, 스케치 화면 해설 등을 모두 입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난히 말이 빠른 출연자가 나올 땐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다양한 프로그램의 프리뷰를 하다보면 잔지식도 많이 생기고, 방송의 과정을 알 수 있어 즐겁다. 방송작가의 꿈을 키우는 다른 친구에게도 프리뷰아르바이트를 소개해서 같이 작업을 하는데, 하루는 야생동물 다큐멘터리 프리뷰를 함께 맡게 되었다.
"너 오늘 무슨 영상 맡았어?" "나 뻐꾸기 탁란 둥지. 너는?""나는 오목눈이 잠복캠."그 날은 프리뷰를 끝낸 후 친구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뻐꾸기와 오목눈이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뻐꾸기와 오목눈이를 주제로 그렇게 흥미로운 대화가 가능할 줄은 프리뷰를 하기 전에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다.
어느 날은 갑자기 친구가 "나 프로폴리스를 사야겠어!"라기에 "갑자기 웬 프로폴리스?"라 물었더니 "프로폴리스가 꿀벌을 이용해서 만든 영양제인데~"하면서 전문가처럼 유창하게 효능을 설명하는 것이다.
"너 혹시.. 양봉업 영상 프리뷰 했니?"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벌침'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친구를 보며 프리뷰어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현혹되지 않게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루는 찜닭가게를 소개하는 맛집 영상을 맡았는데, 몇 시간동안 찜닭만 나오는 영상을 봤더니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찜닭을 주문하고 있었다. 그 날은 프리뷰 해서 번 돈이 1만 5000원이었는데, 찜닭 값이 1만 8000원이 나와 음식 영상은 더 이상 맡지 않겠다는 나름의 직업 철학을 얻을 수 있었다.
프리뷰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하다 보니 나름대로 직업병도 생겼는데, 앞서 말했듯이 정말 흥미로운 방송을 볼 때조차도 마음껏 즐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웃긴 프로그램을 볼 때도 출연자들끼리 오디오가 맞물리기라도 하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고 '아, 제발 프리뷰어를 위해 한 분씩 말씀해주세요...'라고 외친다.
그런가 하면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프리뷰를 떠올릴 때가 있다. 주말에 친구들과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눈으로는 친구를 바라보고 있지만 속으로는
'붐비는 카페 안,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고 친구와 수다 떠는 여자 WS(기자주: waist shot 한 인물의 머리 끝부터 허리 위까지 촬영한 장면)'이라며 화면 구도를 떠올리게 된다.
어깨 뭉침과 눈 따가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영상을 맡겼던 작가님이 '꼼꼼하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해올 때, 그리고 내가 프리뷰한 영상이 방송되는 것을 볼 때의 뿌듯함은 그 모든 힘듦을 상쇄한다.
언젠가 나도 꿈을 이룬 후에 나 같은 방송작가지망생 프리뷰어에게 그런 뿌듯함을 선물해주는 방송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