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어보가 지난 2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출된 지 66년 만의 일이다. 기자가 일하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 종로구 사무실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에 문정왕후어보가 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창문 앞에서 고궁박물관을 향해 서 있다가 사무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온 아주 슬픈 음악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09년부터 문정왕후어보 반환운동을 시작했다. 드디어 그 결실을 맺었는데 '시민단체', '민간단체'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그동안의 노력이 두루뭉술하게 처리된 것 같아 무척 서러웠다. 기자가 입사했을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일본 궁내청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를 포함한 도서 1205책을 반환받았다. 당시에도 문화재청은 혁혁한 공을 세운 '문화재제자리찾기'라는 이름을 '시민단체'라는 이름으로 가렸다. 그래서 입사하자마자 대표에게 처음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나라는 이순신 장군도 백의종군시킨 나라잖아."
그렇게 열심히 교육받았는데도 막상 당해보니 버텨내기 힘들었다. 그 모습이 사진에 담겨 소셜미디어에 퍼졌고 그 사진 한 장으로 엄청 많은 응원 메시지를 받았다. <노컷뉴스> 등과 인터뷰도 하게 됐는데, 이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 같아 이 기사를 쓰게 됐다.
기자가 그날 고궁박물관을 바라보며 서럽게 울었던 이유는 그동안에 받았던 모멸과 비웃음이 생각나서였다. 2016년 초,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민간단체 보조금 신청 면담을 하던 날이었다. 그때 앉아있던 심사위원이 기자에게 말했다.
"정부가 잘하고 있는 일을 시민단체에서 그만 좀 훼방 놓으세요!" 과거 정부가 소위 '시민단체'를 바라보는 시선그렇게 2016년 민간단체 보조금 중 해외출장비용이 전액 삭감됐다. 해외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찾는 단체의 해외출장비용을 전액 삭감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겠다고 공문을 발송했다.
그 정도 되면 '2013년도부터 보조금을 받았던 단체인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며 전화가 올 법도 한데 재단 측은 전화 한 통 없었다. 해외 출장 가 있을 때는 너무 심하게 전화를 걸어와 '제발 이메일로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할 정도인 재단이었는데 말이다. 창밖을 보며 울다 보니 그 당시 심사를 봤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팀장님의 말도 떠올랐다.
"다른 단체는 보고서도 예쁘게 꾸며서 내던데 여기는 참..."
2013년 9월 19일 문정왕후어보 반환 발표가 나던 날도 떠올랐다. 당시 조계종 승려였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승복 바지를 잃어버려 검은 추리닝 바지를 입고 협상장에 갔다. 기자 역시 한복 속치마의 레이스가 밖으로 나와 있는 줄도 모르고 협상장에 들어갔다. 그만큼 협상 문서 이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기자에게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린 작전을 안 짰잖아! 여기 괜히 온 것 같아, 우리 여기 왜 왔어?"이미 최선을 다해 문정왕후어보 반환 논거를 박물관에 전달했고, 만약 박물관 측이 반환 요청을 거절한다면 즉시 LA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에 대한 박물관의 답변만 들으면 되는 상황에서 '작전을 안 짰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힘이 빠졌다.
그런 모멸과 비웃음을 꾹 참으며 했던 운동이 문정왕후어보 반환운동이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언급되지 않고 '민간단체', '시민단체'로 대충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그날 창밖을 보며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문정왕후어보 반환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문정왕후어보 반환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 운동이 총 4개의 악장으로 이뤄진 교향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정왕후어보 반환운동 제1, 제2, 제3악장
제1악장은 2009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로 '논거 확충의 시간'이었다. 어보가 불법 반출됐다는 미국 국무부 문서 확보 및 어보가 한국으로 반환돼야 한다는 법률적 근거를 정리했던 시간이다. 이 작업은 알려진대로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가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 및 미국 내 불자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제2악장은 2013년 4월부터 9월까지 진행된 LA카운티박물관과의 협상 과정이다. 이때 문정왕후어보 반환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발의됐고(아쉽게도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LA카운티박물관과의 1·2차 협상 진행 및 LA카운티슈퍼바이저 면담, 백악관 청원운동 '응답하라 오바마' 등이 진행됐다(LA카운티 박물관은 2013년 9월 19일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발표했다). 이때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3악장은 2013년 10월부터 2017년 6월 30일까지다. 이때부터는 조선왕실어보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환받자는 운동을 두 차례 진행했다.
2014년 4월 25일, 오바마 대통령에게 직접 대한제국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인장 아홉 점을 반환받게 한 작전명 '응답하라 오바마'를 1차로 진행했는데 당시 문정왕후어보가 올 줄 알았으나 오지 못해 다시 반환운동을 진행했다. 그후 2017년 7월이 돼서야 문정왕후어보가 반환돼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 과정에서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많은 도움을 줬다. 한미 수사공조 시스템을 활용해서 검찰총장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줬고, 나아가 정상회담으로 문정왕후어보가 반환될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써줬다.
문정왕후어보가 들러야 할 곳, 회암사
문화재환수운동은 반환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문정왕후어보가 돌아옴과 동시에 제4악장을 시작했다. 기자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문정왕후어보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오던 주말, 양주에 있는 회암사지를 찾았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8일, 회암사에서 무차대회(승려·속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여 법문을 듣는 법회)를 열기로 했으나 안타깝게도 무차대회를 3일 앞둔 4월 5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뒤 무차대회를 주최했던 보우스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 극형에 처해지게 됐고, 회암사는 유생들의 방화로 하루아침에 폐사됐다.
문정왕후어보 반환에 결정적 증거가 됐던 아델리아 홀 레코드(6.25전쟁 당시 미군 병사에 의해 어보가 47과 약탈됐다는 미 국무부 문서)는 회암사 유물을 찾기 위해 미국 내 자료들을 조사하다가 발견한 기록이었다.
이에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회암사지와 문정왕후의 인연이 가볍지 않다고 여겨 2015년 10월부터 문정왕후어보를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긴 호흡으로 3년 정도 앞을 내다보며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두 건 더 있다. 이것은 시민단체만의 순수한 힘으로 해내기 위해 아직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서럽게 울고 난 후 다시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문정왕후어보와 관련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직 서운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교향곡이 끝나면 함께 고생한 모든 이에게 기립 박수가 나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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