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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조선중앙TV는 4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화성-14'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며 ICBM 발사 모습을 공개했다. 사진은 시험발사를 지켜보는 김정은.
북한 조선중앙TV는 4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화성-14'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며 ICBM 발사 모습을 공개했다. 사진은 시험발사를 지켜보는 김정은.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현지시각) 베를린 쾨르버 재단에서 발표한 '한반도 신평화구상'은 북한에 보내는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하다. '산불 공동대응'처럼 마음만 먹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사안부터 시급한 현안인 '이산가족 상봉'은 물론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같은 그랜드 전략까지 포함돼 있다.

문 대통령은 이에 앞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 주도권'을 인정받았고 ▲ 대북 적대시정책 불추진 ▲ 대북 공격 무의도 ▲ 정권교체ㆍ정권 붕괴 불원 ▲ 인위적 한반도 통일 가속화하지 않음 등 이른바 '4No'에 대한 지지도 끌어냈다. 남북대화를 끌어내기 위해 '북한 체제를 보장한다'는 뜻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제시하는 사전포석이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음에도, 문 대통령이 북한 체제를 보장하고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을 선언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사실상 중국의 '쌍궤병행론'을 수용한 것이다. 반면 미국은 명시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병행'보다는 '비핵화'를 우선한다.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인 북한이 문 대통령의 '한반도 신평화구상'을 수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희망적인 예상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핸드폰 사용자 370만, 북한 경제 호전... 대남 의존도 낮춰

문재인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로부터 그 기조를 이어받은 햇볕정책의 핵심은 '안보-경제 교환론'이다. 경제지원을 통한 교류·협력 활성화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끌어내 평화를 유지하면서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북한을 통일로 가는 동반자로 규정하면서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북한은 소련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따른 '체제 위기' 상황이었다. 중국 외교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노태우의 북방정책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북한에 대해 오락가락하던 김영삼 대통령도 1994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자 같은 태도를 취했다. "돈 주면 안 되겠나"라는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이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예정대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대북 경제협력과 평화를 맞바꾸는 방향이 됐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북한이 '생존 위기'에 내몰렸던 시기에 맺은 김대중 대통령의 6.15선언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10.4선언은 확실하게 대북지원과 남북협력을 교환하는 구조였다.

모두 북한이 남한의 경제적 지원을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의 대북 접근법이었다. 북한이 비핵화하고 개방에 나서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겠다는 (북한이 어떻게 비핵화·개방하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은 없다는 점에서) 황당한 '비핵개방 3000'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도 '극심한 경제난으로 당장이라도 망할 수 있는 북한'이라는 정세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김정일 시대의 북한'이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지나면서 달라졌다. 악성 경제위기는 여전하지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은 벗어났다. 핸드폰 사용자 규모가 370만 명을 상회한다는 팩트(사실)가 이를 웅변한다. 우리 통계청과 한국은행 지표상으로도 북한의 경제가 호전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유엔 역사상 비군사적 조치로는 가강 강력한 제재"라는 대북 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현인택 통일부 장관에게 "남북경제협력 중단이 북한을 중국 경제권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 것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됐다.

북한의 대중교역비중은 90%를 넘어섰고, 폐쇄된 개성공단 노동자들은 중국으로 갔다. 남한은 정권이 바뀌면 대북정책도 바뀐다는 것도 이미 몇 차례 경험했다. 정권 말에 한 약속이 유지되겠냐며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을 탐탁치 않아 한 김정일 위원장의 예상도 사실로 드러났다. 북한은 대남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갔다. 선대와는 달라진 '김정은 시대의 북한' 모습이다.

'이명박·박근혜 9년'... 북,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새 전략노선' 설정

 지난 5일 합참이 공개한 한미 미사일 동시 사격훈련 사진.
지난 5일 합참이 공개한 한미 미사일 동시 사격훈련 사진. ⓒ 합참

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핵개발에 나선 제일 큰 이유는 대미협상용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김정일 시대에는 들어맞았다. 북한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 나와서 2005년에는 북핵 문제 해결의 이정표라는 '9.19 공동성명'에도 응했고, 2007년에는  '모든 현존 핵시설 불능화-모든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 완료' 등의 내용을 담은 '2.13합의'와 '10.3합의'에도 응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얘기는 거의 꺼내지도 않는다.

"북에게 핵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들로서는 매우 합리적이다. 우리는 북한 정권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습 엘리트인 김정은이 이걸 믿겠나."

러시아 출신으로 1980년대에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공부한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말을 반박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2006년 사형당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핵을 갖고 있었다면, 또 2011년 반군의 총에 죽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대통령이 미국과의 약속대로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핵을 추구했다면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김정은 위원장이 인식한다는 데 이견을 다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결국 북한은 2012년 4월 헌법에 '핵보유국'이라고 명시했고, 다음해 3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새로운 전략노선'으로 규정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자연인이었던 지난 3월 천주교 신도 대상 강연에서 "북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그 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북핵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어설프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1년 빠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북한은 변했다. '번영'은 언감생심이지만, 일단 '체제 유지'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북한 문제 해결 과정에서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게 됐다. 사실상 북핵 문제를 방기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공백기가,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뼈아프다.

문 대통령의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 공식 선언은 우리에게는 획기적인 것일 수 있지만, 북한은 지난해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주창한 '쌍궤병행론'을 이미 거부한 바 있다.

왕이 부장은 당시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한미 합동 군사훈련, 동시 잠정 중단'이라는 이른바 '쌍중단'(雙中斷, 중국식 표현은 쌍잠정)을 '쌍궤병행'(비핵화-평화협정 동시추진)으로 가는 입구로 설정했다. 북한도 '쌍궤병행'까지는 아니지만, 지난 달 21일 계춘영 주인도 대사를 통해 일단 쌍중단까지는 동의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일 오전(현지시간) 베를린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며 미소 짓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일 오전(현지시간) 베를린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며 미소 짓고 있다. ⓒ 연합뉴스

문 대통령 "6.25 이후 최대 위기"... 비상상황에는 비상하게 대응해야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과정에서 '쌍중단'은 안 된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의 반대 입장 등을 고려한 것이지만, 이로써 문 대통령이 비핵화로 가는 1단계로 설정한 '북한의 핵활동 동결'을 끌어낼 방법이 무엇인지 답하기는 어려워졌다.

문 대통령은 현재 상황을 "지금 6.25 전쟁 이후 최대 위기"라고 규정했다. 비상상황에는 비상한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달리 압박의 목적이 대화라는 점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압박과 대화를 연결시킬 고리가 없다면 결과는 '오로지 압박'으로 나타날 뿐이다.

미국과 한국 내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는 대북정책은 국내정치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정작 남북 대화나 북핵 문제는 악화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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