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은 내가 겪은 마흔 번의 여름 중 최악이었다.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다. 선풍기 바람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더운 날이 이어질 땐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평소 찬 음식을 즐기지 않는데 여름 내내 얼음물을 달고 살았다. 냉동실에 얼음이 끊일 날이 없었다.
벌써부터 푹푹 찌는 것이 올해도 작년 못지않게 뜨거운 여름이 될 것 같다. 며칠 전 큼지막한 얼음 틀을 하나 샀다. 물만 부어 놓으면 주먹만 한 얼음이 세 개나 나온다. 자잘한 얼음에 비해 녹는 속력이 더뎌 시원한 물을 더 오래 마실 수 있다. 3000원으로 이만한 기쁨을 얻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얼음만으론 부족하다. 선풍기만 돌아가는 집에서 뜨거운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땀이 줄줄 흐른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무조건 체온보다 낮아야한다. 음식을 먹기 위해 손과 입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열이 발생한다. 그 와중에 뜨거운 음식을 삼키는 것은 난로를 몸 안에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행히 우리에겐 냉장고가 있다. 무엇이든 넣기만 하면 차게 식혀주고 꽝꽝 얼려 주기까지 한다. 몇 시간만 밖에 놔둬도 축축 처지는 채소들을 며칠씩 생생하게 보관할 수도 있다. 냉장고는 존재 자체로 생활복지다. 앞으로 최소 한 달은 무더위가 이어질 텐데, 부디 열일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냉장고 찬사를 적어볼까 한다. 냉장고의 시작과 끝을 알려줄 책들을 소개한다.
냉장고의 탄생 | 톰 잭슨 지음 | MID 펴냄
'인류는 적어도 10만 년 전에 불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그 뒤로 내내 열과 빛을 통제했다. 그리고 우리는 겨우 100년 전에 차가움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10쪽)전기로 작동하는 냉장고는 1918년에 처음 나왔다. 냉장고의 나이는 이제 고작 백 살이지만 세상에 나오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냉장고의 역사는 얼음을 녹지 않게 하거나 음식을 시원하게 먹기 위한 온갖 방편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냉장고의 탄생'은 이 과정을 세밀하게 담았다.
더운 지역에선 얼음을 얻기가 아주 어렵다. 눈이 오지 않는 곳에서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얼음은 우박뿐이다. 하지만 우박은 너무 빨리 녹았다.
35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귀족들은 시원한 와인을 먹기 위해 노예에게 부채질을 시켰다. 노예들이 쉴 새 없이 부채질을 한 것은 바로 와인이 담긴 흙 항아리. 이 흙 항아리는 지난 밤 물에 담가두었던 것이다. 항아리 표면이 밤새 많은 물을 흡수하게 두었다가 낮 동안 부채질을 하면 물이 수증기가 되어 날아간다.
이때 항아리 표면 온도가 내려가면서 와인이 시원해진다. 이 방법은 땀이 난 피부에 바람을 쐬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따왔다. 증발 냉각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냉장고를 만든 기체열역학의 기본이 되는 이론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자연 상태에서 물질을 차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적용까지 한 셈이다. 다만, 자신이 마시지도 못하는 와인 한 잔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을 했을 노예들을 생각하면 묵념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여름과 겨울이 분명한 지역에선 겨울 동안 얼음을 모아 여름에 사용했다. 이를 위해 시원한 곳에 저장고를 만들었다. 책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동빙고와 석빙고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겨울에 한강이 얼었을 때 얼음을 캐서 저장했다. 서빙고의 얼음은 주로 요리에 사용되었고, 가장 유명한 음식은 빙수였다. (중략) 왕립 얼음 창고에서 나오는 얼음은 지위에 따라 배분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동빙고에서 중요했다. 동빙고의 얼음은 음식이 아니라 의례에 사용되었다.' 저자가 영국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책을 쓰기 위해 꽤 광범위한 조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국사책에도 이런 내용이 나왔더라면 수업시간에 좀 덜 졸지 않았을까 싶다. 총12개의 장 가운데 냉장고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8장에야 나온다. 냉장고는 아주 지루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얼음과 물을 얼고 녹게 만드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과정이 필요했고, 기체의 부피와 압력과 온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보일, 갈릴레오, 토리첼리, 파스칼, 베이컨까지 당대의 철학자와 과학자들까지 모조리 소환해야 했다.
과학과 철학 지식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얽혀 드디어 냉각의 원리를 파악했다. 이들이 알아낸 것은, 자연의 얼음으로는 새로운 얼음을 만들 수 없다는, 지금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진리였다.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자연 얼음이 아닌 인공 얼음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고, 냉장고 탄생에 힘을 실어주었다.
냉장고는 식품 산업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아메리카 대륙의 '죽은 고기'가 유럽으로' 갈 수 있었고(256쪽) 뉴욕에서도 캘리포니아의 익은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261쪽). 저자는 식품이 냉장고를 통해 여기저기 전달되는 과정을 '냉장 체인'이라 부르며, 이 체인의 종착지는 바로 가정이라고 밝힌다. 그 중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슈퍼마켓'이다. 슈퍼마켓은 가정용 냉장고의 보급과 함께 등장했다. 슈퍼마켓은 '커다란 냉장고'나 마찬가지다.
책은 냉장고의 미래를 전망하며 끝난다. 냉장고에 안에 든 식품의 종류와 유통기한을 파악해 알려주는 스마트 냉장고가 조만간 지금의 냉장고를 대체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주정거장엔 우주선을 냉각시키는 '우주선 냉장고'가 필요하고 사람들은 수명 연장을 위해 스스로 냉동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냉장고의 진화는 무궁무진하다. 냉장고에 담긴 복잡한 과학 원리와 역사, 사회상, 문화와 미래까지 냉장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보기 드문 책이다.
냉장고 정리술 | 시마모토 미유키 지음 | 중앙북스 펴냄
냉장고의 존재 이유는 식품을 좀 더 신선하고 오래 보관하는 것이다. 냉장고의 역사와 원리를 알았다면 이제 사용법을 익힐 차례다.
여름철만 되면 인터넷 여기저기에 냉장고 정리와 관련한 정보가 넘쳐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한다고 했던가. 흩어져 있는 정보를 한 권에 정리한 책이다.
저자가 추천하는 냉장고 수납의 기본규칙은 재료별로 지정석을 정해 모아두기, 식품을 겹쳐 놓지 말고 잘 보이게 놓기, 함께 사용하는 재료들은 작은 바구니에 그룹별로 모아놓기, 꺼내기 쉽게 정리하기 등, 네 가지다.
냉장고 문에 달린 공간은 열고 닫을 때마다 온도 변화가 커서 조미료나 음료수처럼 온도 변화에 민감하지 않은 음식을 보관하는 것이 좋고, 뜨거운 것은 완전히 식혀 넣는다. 주의해야할 점은 식품을 검은 비닐봉지 째로 넣지 않는 것이다. 속이 보이지 않아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어 먹을 시기를 놓치기 쉽다.
냉장고 정리의 80%는 '손질'이다. 당근을 여러 개 샀다면 남은 것을 어떻게 보관하는 게 좋을까. 흙이 묻은 당근이라면 주방휴지로 감싸 지퍼 백에 넣어 채소실에 보관하면 1~2주 동안 거뜬하다. 때론 용도에 맞게 잘라서 지퍼 백에 넣어 냉동하거나 데쳐서 식힌 뒤 얼릴 수도 있다. 데쳐서 얼릴 때는 우선 쟁반에 펼쳐 얼린 뒤 이를 지퍼 백에 옮겨 담으면 재료끼리 달라붙지 않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 정도 노동 없이 냉장고를 깔끔하게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책에는 흔히 먹는 채소와 과일, 고기, 생선 손질법과 저장법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돼 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식품들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 신경 쓰이고 물건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의 부엌 |류지현 지음 | 낮은산 펴냄생태 부엌 |김미수 지음 | CSMA 펴냄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처음 냉장고가 들어온 것은 1980년이다. 다른 집에 비해 몇 년 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세 살이었으니 내 기억에 우리 집엔 늘 냉장고가 있었다. 지금처럼 1년 내내 냉장고를 사용하진 않았다.
우리 집에선 1990년대 초까지 여름에만 냉장고를 돌렸다. 한여름을 빼면 반찬은 부엌의 찬장에, 나머지 식재료는 뿌리 쪽을 땅에 묻거나 서늘한 뒷마당에 뒀다. 전기요금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엔 냉장고를 여름철에만 사용하는 전자제품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단다.
3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인데도 냉장고가 없을 땐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사람의 부엌>은 냉장고 없이 사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기록한 책이다.
디자이너인 류지현 작가에게 냉장고는 단순히 음식물을 저장하는 가전제품이 아닌 소비와 자본의 상징이다. 그는 '냉장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인류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귀중한 앎이 닫힌다'며 하나의 생명인 식재료를 대하는 태도에서 생명을 다루는 삶의 방식을 되짚어보자고 제안한다.
책에는 포도를 싱싱하게 보관하기 위해 물이 담긴 유리병에 포도가지를 담가 놓고, 실온에서 아무런 첨가물 없이 우유로 치즈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금에 절이고, 잼을 만들고, 말리고, 땅에 묻고, 때론 얼리고 썩히는 온갖 저장법을 익히려면 식재료 이해는 물론 주위 환경과 생활 조건까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탐구해야한다.
<사람의 부엌>은 냉장고와 재료의 작은 틀을 벗어나 생태계 안에서 조화롭게 사는 방식을 잔잔하고 담백한 에세이로 보여준다.
<생태 부엌>은 작가가 독일에서 생태토양학자인 남편과 함께 12년간 냉장고 없이 완전 채식의 생태적인 삶을 살아온 노하우를 담은 책이다. 채소를 가꾸고 손질하는 법부터 기본양념 만드는 법, 다양한 샐러드와 스프, 밥 짓는 법 등을 풍부하고 자세하게 소개한다.
<사람의 부엌>이 생활 모습과 배경에 집중했다면, <생태 부엌>은 냉장고 없이 사는 실전을 다룬 책이다. 단순한 채소 몇 가지로 이국적인 요리를 뚝딱 만들 수 있는 팁을 자세히 소개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