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방진관' 담장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벽화들이 단정하게 게시되어 있다. '단정하게'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곳 벽화들이 담에 곧장 그려진 수준이 아니라 액자에 고이 모셔진 타일 그림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이순신 12경길 담장 벽화'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벽화들은 충무공과 관련된 기록화들이다.
군수 사택을 방진관으로 만들어 일반에 개방방진관에 벽화가 게시된 것은 이 집이 본래 군수 사택이었기 때문이다. 군수 사택이라고 해서 필연적으로 벽화가 그려지는 것은 아니므로 그 군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아야겠다. 사택을 방진관으로 내놓은 21세기의 군수는 이용부이고 조선 시대의 군수는 방진이다. 집 입구 길가의 안내판을 읽어본다.
"방진(方震, 1514∼?)은 충무공 이순신의 장인으로 조선 시대 보성 군수를 지냈다. 그에게는 부인 홍씨와 딸, 아들 숙주(淑周, 1564∼?)가 있었다. 방진은 활을 잘 쏘기로 이름이 높아 역대 명궁에 올랐다. 특별히 조선 시대 선조 대에 명궁사들이 많아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이름을 남겼다.어린 시절을 보성에서 보낸 방씨 부인은 두 살 위의 이순신과 1565년에 혼인하였고, 영특하기가 남달랐으며, 전쟁에 나간 이순신을 내조하여 집안을 돌보았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 방씨 부인은 정경부인의 품계에 이르고 80세를 누렸다. 2015년 보성군은 한국 여성상의 표상인 방씨 부인과 그의 아버지 방진의 뜻을 기리어, 보성 군민의 자긍심과 지역의 정체성을 드높이고자 역사교육의 장 방진관을 개관하였다."안내판을 읽고 나니 이 집 담에 이순신 기록화들이 벽화 형태로 게시되어 있는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방진이 이순신의 장인이라는 점을 기려 담장에 임진왜란의 역사를 그려 넣은 것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뜰 왼쪽에 과녁판이 보인다. 좁은 마당에 과녁을 세워 둔 것은 방진이 당대의 명궁이었다는 점을 답사자들에게 상기시키려는 장치이다.
당대 명궁으로 유명했던 이순신의 장인
열선루 |
열선루는 이순신이 1597년 8월 15일 칠천량 대패 후 수군을 해체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하고 장계를 썼던 유적이다. 원래 보성읍성 객관 북쪽(현재 초등학교 위치)에 있었으나 1597년 8월 20일 무렵 일본군에 의해 불탔다. 열선루는 2018년 군청 앞 신흥 동산 정상부에 중건될 예정이다. 보성 일원을 사방으로 훤히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열선루가 중건되면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여행지가 나라 안에 한 곳 늘어나고, 보성군은 훌륭한 관광자원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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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으로 들어서면 군수 관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는 느낌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정돈된 전시장이 나타난다. 거실로 사용되었던 가운데 공간에는 이순신 영정, 열선루 복원도, 이순신 연표 등이 걸려 있다.
그림이 흔히 보아온 충무공 영정과 달라 처음에는 방진 초상인가 여겨지지만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이순신이다. 현재 나라 곳곳에 걸려 있는 '이순신 표준 영정(1973년 지정)'이 친일파 화가의 작품이라는 논란을 생각하면 방진관의 이순신 전신도(全身圖) 전시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의 올곧은 조치로 여겨진다.
게다가 이렇게 가까이서 장군의 초상을 본 적도 없다. 이곳의 이순신 영정은 순천 충무사 사당의 것이다. 친일파 화가의 작품이 아닌 충무공 영정을 보게 되었다는 반가운 마음에 사로잡혀 몇 번이나 장군의 얼굴을 쳐다본다. 살아 계신다면 어찌 감히 이렇듯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칠 수 있으랴! 오늘은 그저 황홀한 하루다.
안내판은 이곳 충무공 영정이 1945∼1947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순천 충무사의 충무공 영정은 해방 직후 지역 유림들이 직접 그린 초상화로서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을뿐더러 일제가 1943년에 소각했던 본래 영정을 기억에서 되살려 그렸다는 소중한 의미가 있다. 그 뜻을 잇기 위해 방진관은 순천 충무사의 충무공 영정을 사진으로 찍어 답사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순천 충무사의 내삼문과 재실이다. 평소 내삼문이 닫혀 있어 찾아가도 충무공 영정은 말할 것도 없이 볼 수 없고, 사당 건물도 담 너머로 일부 면만 볼 수 있다. 방진관에서 순천 충무사의 충무공 영정을 만나는 경험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거실 둘레로 이순신실, 방진실, 방씨부인실이 따로따로 꾸며져 있다. 이순신실에는 <난중일기>에 실려 있는 이순신의 보성 열흘 동안의 기록으로 만든 병풍과 덕수이씨 족보 등이 전시되어 있고, 방진실에는 그에 대한 소개 게시물과 온양방씨 족보 등이 있다.
다른 곳에서 본 것들보다 훨씬 대형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는 판옥선 그림이 인상적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각선도본전선(各船圖本戰船)>에 실려 있는 판옥선 그림을 복제한 전시물인데, 자세히 보면 '戰船(전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전투를 한 조선 수군의 대표 전함이 판옥선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방진관의 기록화들은 전남대 노기욱 선임연구원의 작품방씨부인실에도 그림이 많다.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노기욱 선임연구원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방씨부인의 어릴 때 일화를 기록화로 형상화했다. 일화를 읽어본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도둑들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졌다. 방진이 외동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이미 화적들이 종과 내통하여 화살을 몰래 훔쳐낸 뒤였으므로 남은 것이 없었다. 방진의 딸이 베틀의 뱁댕이를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바닥으로 내던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아버지, 화살 여기 있습니다!"방진의 활 솜씨를 두려워 했던 화적들은 화살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줄 오인하고 놀라서 도망쳤다. 이때 딸의 나이 겨우 12세였다. 이와 같이 방씨부인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방진관의 소형 홍보물에는 이 집의 현판 글씨가 충무공의 초서체 글자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또 득량면과 선소마을의 이름에도 이순신의 자취가 서려 있다고 소개한다. 득량(得糧)은 양(糧)식을 얻었다(得)는 뜻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이곳에서 군량미를 확보했다고 하여 득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해설이다.
득량면, 선소마을 등의 지명도 이순신과 유관득량면 비봉리에 있는 선소마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선소(船所)의 현대어는 조선소(造船所)이다. 즉, 선소는 배(船)를 만드는(造) 곳(所)이라는 뜻이다. 득량면에 선소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일대가 한때 조선소였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선소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보성 주둔 수군의 무기와 병선을 만드는 군사 시설이었고, 완성된 배들이 머무르는 정박처이기도 했다.
홍보물에는 득량면 삼정리 108-1에 있는 충절사(忠節祠)에 관한 소개도 실려 있다. 충절사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무관 최대성(崔大晟, 1553∼1598)과 그의 아들 최연립, 최후립을 모시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초의 승리인 옥포 승전에 관한 이순신의 보고서 <옥포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 '한후장(捍後將, 후방을 막는 장수)인 신의 군관 급제(及第, 과거 급제자) 최대성은 왜적의 큰 배 한 척을 쳐부수었습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대성은 칠천량 대패 이후 수군이 무너진 상황을 맞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송대립(宋大立), 전방삭(全方朔), 김덕방(金德邦), 황원복(黃元福) 등과 20여 차례 일본군과 맞서 싸워 지역민들을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1598년 6월 보성 안치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던 중 불행히도 유탄에 맞아 마침내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두 아들 최언립과 최후립도 이 전투에서 순절했다. 충절사는 세 부자가 전사한 군머리(軍頭)에 세워져 있다.
삼대가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운 최대성 가문1605년(선조 38) 두 아들 최언립과 최후립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최대성의 손자 최강(崔崗), 최현(崔峴), 최곤(崔崑)이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웠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는 이를 두고 "삼대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 가문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