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6일, 서울고등법원 505호 소법정에 인파가 몰렸다. 이날 오후 2시에 선고될 옥시와 세퓨 관계자들의 항소심 선고공판 때문이다. 재판시작 30분을 앞둔 1시 반쯤 법정에 도착했으나, 방청을 원하는 피해자들과 시민들, 취재진이 몰려 도저히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법정 방청석을 가득 채우고도, 스무 명의 인파가 출입구 밖에서 초조히 재판을 기다렸다. 일부 피고인들 또한 재판시간이 다 되도록 법정 밖 의자에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존 리 전 대표를 비롯한 피고인들의 표정 또한 긴장되어 보였다. 그들은 2시 5분이 넘어서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때마침 강찬호 대표(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아래 가피모)도 도착했다.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고 있냐고 묻자, 그는 "음... 글쎄요" 라며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7분 정도 지났을 무렵 선고가 시작되었다. 어수선했던 법정 앞 대기실은 숨죽은 듯 조용해졌다. 2시 14분쯤에는 방청 중이던 학생이 쓰려져 급히 나오는 소동도 있었다. 재판장의 목소리와 기자들의 타이핑 소리는 어느새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마침내 선고결과가 나왔다. 한 방울도 흘리기 아까운 비싼 보약이라도 먹는 듯, 재판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며 경청하던 피해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1심에 비해 평균 1년 정도 감형되었고, 존 리 대표는 원심과 같은 무죄가 유지되었다. 피해자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는 역부족이었다. 처음 나와서 재판결과를 봤다는 한 피해자 가족은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2013년에 3살짜리 손자를 잃었고, 며느리는 유산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며,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외면한 결과"라고 한탄했다.
가피모 회원들과 가습기살균제참사 전국네트워크(아래 가습기넷)는 재판이 끝나고 2시 20분에 기자회견을 열고 항소심 선고결과를 비판했다. 최재홍 변호사(민변 환경보건위원장)는 "1심에서의 중형과 항소심에서의 감형이라는 일반적 기업범죄의 전형적 절차를 이어간 것 같다"고 총평하며, 재판부가 양형상 이유에서 "피고인들이 가습기살균제특별법 제정에 도움을 준 점, 피해자들과 합의노력을 했으며, 1~2단계 피해자들과 90% 가량 합의한 부분 등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CMIT/MIT에 대한 인과관계 조사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감안한 때 미흡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존 리 전 대표의 무죄선고에 대해서는, "외국계 임원들을 비롯해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부족했다"며 검찰의 초기대응을 꼬집었다.
가피모 강찬호 대표는 "한 사람이 죽어도 7년형은 부족한데, 셀 수 없이 늘어나고 있는 피해자를 감안하면 국민상식상 용납할 수 없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터무니없는 처벌 때문에 수많은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고 죽어나가는 것"이라며, "법원이 진정 피해자들의 억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분노 섞인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이들은 고소하지 않은 나머지 피해자들과 함께 추가고소를 통해 재조사를 통한 진상규명에 나서겠다고 밝혔으며, 검찰의 상고를 통한 추가수사를 촉구했다.
기자회견 중 예기치 않은 소란도 있었다. 35분 쯤 법원경위들이 기자회견을 집회로 보고, 해산을 종용하며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5분여간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참여자들은 마이크를 끄고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지난 1심 선고 때와 비슷한 일이 이번에도 반복되었다. 2시 50분쯤 기자회견은 마무리되었고 이들은 3시가 좀 안 되서 법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