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토) 오전 9시,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국동소재)에 한국작가회의 여수지부(회장 이옥근) 회원 30명이 모였다. 탐방주제는 '이정훈 지리학자와 함께하는 여순사건 사적지에 대한 다크투어'이다.
탐방지는 신월동 14연대 주둔지 - 인구부전투지 - 서초등학교 - 중앙동 인민대회장소 - 중앙초등학교 - 마래터널 - 만성리학살지 - 만성리 형제묘 - 호명동 암매장지 순이었다. 여순사건의 발발지였던 14연대 주둔지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이정훈 지리학자가 '다크투어'에 관해 정의를 내렸다.
"다크투어란 일반적으로 전쟁, 학살 등 비극적 역사현장이나 재난 등이 일어났던 비극의 현장을 순례하면서 슬픔을 공유하고 추모와 성찰의 계기로 삼는 여행을 말합니다"여순사건, 분단 정부수립과 국가 건설과정에서 발생한 국가폭력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좌익 군인들이 제주도 봉기를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사건이다. 당시 14연대 좌익 군인들이 주도한 봉기는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그 세력은 전남 동부지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 후 미군의 개입과 국군토벌대의 진압작전으로 1948년 10월 27일 봉기는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봉기군에 협조하거나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식재판없이 희생당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반공정책에 의해 억눌려 그 실상에 대한 언급이 오늘날까지 금기시 되어오다가 90년대 후반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여순사건 실태 조사보고서> 발간으로 재조명되었다.
그 후 지역에서 제주 4.3 사건 경우처럼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과 지역출신 국회의원과 시의회의 법안발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졌으나 각 당과 지자체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국회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순사건의 성격은 지금까지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반란사건으로 규정되었다. 봉기배경보다 좌익군인들이 일부 불순세력과 규합해 제주도 항쟁을 진압하라는 정부명령을 거부한 항명사건으로 보고 있다.
여순사건은 사건 직후 순천, 광양, 보성, 장흥, 고흥, 화순, 곡성, 구례, 하동과 함양 일부가 점령되어 약 1만여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당시 사건을 전후해 좌익이 경찰과 우익인사를 학살한 경우보다 진압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경우가 훨씬 많았고 잔인했다. <빨갱이의 탄생> 저자이자 국사편찬위원인 김득중씨가 저서에 쓴 글이다.
"정부는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고 민간인들이 봉기군에 협조했기 때문에, 그들이 빨갱이였기 때문에 처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빨갱이였기 때문에 처벌받은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처벌 받은 뒤에 빨갱이가 되었다" 마지막 탐방지인 호명동 암매장지 답사를 마친 이정훈씨가 매듭을 지었다.
"여순사건은 단순히 군인 봉기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역의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직후 토지개혁, 친일파 척결 등 해결해야할 과제가 누적된 채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기념탑은 제주와 광주, 거창에도 세워졌지만 여수에는 없다. 지역시민사회단체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고 법적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초 국민의당 정인화 의원(광양·곡성·구례)은 여수·순천 10.19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 보상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발의된 '여순사건 보상 특별법'에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보상위원회'를 둬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위령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희생자의 피해 정도를 고려해 보상금과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